작품명 : 정원에 길을 묻다
성 명 : 김미월

스크롤바를 화면 아래로 천천히 끌어내렸다.

나는 ‘미스 대전’으로 불린다. 그렇다고 내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대전 지역 예선에 출전할 만큼 미인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내가 이 당치 않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이름 때문이다. 내 이름은 공사이. 042, 바로 대전의 전화 지역번호다. 이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종종 놀림을 받곤 하지만 그래도 난 내 이름에 만족한다. 엄마는 작부라는 직업상 내 아빠가 누군지 본인도 알 수 없었으므로 자신의 성인 ‘공’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을 게다. 또한, 일자무식이라 작명법 따윈 쥐뿔도 몰랐으므로 내 생일인 ‘4월 2일’을 줄여서 그냥 ‘사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밖에 없었을 테다. 생각해 보면 내가 4월 8일에 태어나지 않은 게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쨌든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나는 효녀다. 그러므로 엄마가 나의 효도를 미처 받아보기도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실소가 나왔다. 오랜만에 읽어 보니 너무 낯설어서 내가 언제 이런 맹랑한 글을 썼었나,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 글의 내용이 사실이냐고 묻다니 그 방문객 참 순진하기도 하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진짜 자기소개를 이 따위로 하겠는가? 우리 엄만 술집 여자요, 난 아비 없는 자식이오, 하고 자랑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공사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름인가. 읽다 말고 팽개쳐 둔 무협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주인공이 막 무림의 최고수인 원수의 집 담을 넘으려던 참이었다. 책장이 덮이는 바람에 담을 넘던 자세 그대로 공중에서 위태롭게 멈춰 있을 그를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프로필에 대해 궁금해하는 방문객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게 그렇게 별스러워 보였나? 나는 그저 좀 튀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 종류의 사이트를 찾는 이들에게는 대문의 문양이나 메뉴의 다양성, 링크의 안정성보다 운영자의 참신하고 명쾌한 프로필 몇 줄이 훨씬 더 효과적인 미끼가 된다. 나는 그냥 학력과 수상 경력, 문재(文才)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타 사이트들의 프로필과 차별화되는, 독특하면서도 도발적인 글을 쓰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먹구름이 달을 가린 밤, 그는 비호와 같이 날렵한 동작으로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방문객은 내게 메일을 보냈다. 그는 지금 괜한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않고 직접 메일을 보냈다는 건 진짜로 내게 일을 맡길 용의가 있다는 얘기다. 즉 그는 예비 고객으로서 일종의 탐색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답장을 써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뭐라고 쓰지? 무의식적으로 스크롤바를 끌어올렸다 끌어내리기를 반복했다. ‘공사이’라는 인물의 프로필이 위아래로 춤을 추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쓰자니 왜 프로필에 거짓 정보를 올렸냐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웠다. 사실이라고 쓰자니 스스로 에미애비도 없는 인간임을 광고한 꼴이 되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이거야말로 자가당착이군. 나는 메뉴바의 ‘답장’을 선뜻 클릭하지 못하고 마우스 왼쪽 버튼 위에 올려놓은 집게손가락만 까딱거린다.


나의 직업은 속칭 ‘해결사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남의 글을 대신 써 주는 게 나의 주 업무다. 사실 글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한, 대학생들이 청탁하는 그저 그런 리포트들이 일거리의 대부분이다. 그래도 나는 직업 정신이 투철해서 아무리 대수롭잖은 잡문 나부랭이라도 최선을 다해 쓴다. 다행히 문장력도 괜찮은 편이고 자료 수집에도 성실하기 때문에 내 글이 고객을 실망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일을 해 온 이 년간, 단 한 번도 환불 요청을 받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해 준다.


욕실에서 새된 기계음이 들려왔다. 세탁 종료를 알리는 세탁기의 신호음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욕실까지의 거리는 내 보폭으로 딱 네 걸음이다. 열 번 울리도록 설정돼 있는 신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세탁기 뚜껑을 열었다. 마구 엉켜 있는 빨래들을 한꺼번에 들어올렸다. 무언가가 세탁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라 세탁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열쇠였다. 허리를 구부리고 세탁조 안으로 팔을 뻗었다. 손끝에 딸려 나온 것은 5cm가량의 길이에 구릿빛을 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열쇠였다. 그러나 내 것은 아니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둥글게 생긴 머리 부분에 음각으로 ‘I-LOCK’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을 뿐, 주인을 짐작해낼 만한 단서는 없었다.


희한한 일이네. 혼자 사용하는 세탁기에서 주인을 알 수 없는 물건이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 건물에 세 든 이래 다른 누군가의 빨래를 해 주기는커녕, 누군가를 집에 데려온 적도 없었다. 누군가 내 호주머니에 물건을 몰래 집어넣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나는 요 근래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 건물에 사는 다른 세입자들과 복도에서 몇 번 스친 일이 있을 뿐이다. 문득 며칠 전 복도에서 마주쳤던 앞집 남자가 떠올랐다. 그와 나는 서로 얼굴은 알지만 목례조차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다. 남자는 열쇠공을 불러 현관문의 보조키를 새로 설치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열쇠를 잃어버렸나 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었다. 그가 잃어버린 열쇠가 지금 내 세탁기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눈인사도 오가지 않는데 열쇠가 오고갈 틈이 어디 있겠는가.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순간 등 뒤에서 살기를 느낀 무예의 고수처럼 날쌘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수건걸이에 걸려 있는 추레한 수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까짓것, 아무렴 어때.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는 건 따분한 일이다. 어차피 이 세상엔 이성이나 논리로, 혹은 경험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 열쇠는 건망 증세가 있는 내가 어디선가 주워 온 것일지도 모른다.


컴퓨터 스피커에서 빠르고 경쾌한 전자음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곡이었다. 다시 네 걸음 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이디를 보니 발신인은 내게 프로필의 진위에 대해 물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아직 답장도 안 썼는데, 이 사람 꽤나 급했나 보다. 서둘러 메일을 열었다.


당신의 소개서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로 시작되는 그의 메일은 내게 글을 청탁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오호,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으니 내게 일을 맡기겠다? 나는 별안간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아비의 원수를 갚은 검객처럼 홀가분해졌다. 그러나 곧이어 그가 요구하는 글의 주제를 보자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내게 청하는 글은 다름 아닌 ‘자기소개서’였다. 이런저런 책이나 영화의 감상문에서부터 국악의 대중화, 남성성과 여성성, 실패한 혁명의 역사, 심지어는 물고기의 교미 방식에 이르기까지 갖은 주제의 글들을 청탁받아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자기소개를 자기가 안 하면 도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남의 소개를 내가 해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들어온 일감을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메뉴의 ‘답장’을 클릭하지 못하고 나는 마우스만 일없이 만지작거렸다. 이거야 원, 이제는 죽은 줄 알았던 아비의 원수가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다.

오전 10시, 식물에게 물 주는 데 최적의 시간. 상온과 비슷한 온도로 맞춰 놓았던 물을 물뿌리개에 담았다. 발소리를 죽여 옥상까지 이어진 도합 다섯 층의 계단을 올랐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은 평소와 다름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머리는 앞을 향해 고정시킨 채 눈동자만 굴려 좌우를 살폈다. 사방이 고요했다. 주인집 한 호밖에 없는 오층은 주인 부부가 해외에 나가 있는 터라 통째로 비어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열쇠 꾸러미 쩔렁거리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층계 참의 적요를 깼다. 구멍과 아귀가 꼭 맞는 열쇠가 돌아가면서 찰칵,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리라 기대하자 흥분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놀랍게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일시에 곤두섰다. 누가 이걸 열었지? 누가 안에 들어왔던 걸까? 그러나 몇 달 동안 혼자 드나들었던 이곳에 다른 누군가가 올 턱이 없었다. 어제 아침에 깜빡 잊고 잠그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지 않았는가. 나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을 열었다.


뒤편에 심어 놓은 유카와 행운목, 파키라, 벤저민고무나무 등속의 키가 큰 관엽식물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정원을 향해 걸었다. 중간 키의 달리아와 백일홍, 작은 키의 베고니아와 천수국, 채송화 등 여름내 꽃을 피웠던 식물들이 꽃을 다 떨어뜨린 몸으로 햇빛 세례를 받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채 말라가는 꽃 냄새와 풀 냄새, 흙 냄새가 들큼하고 쌉쌀하게 뒤엉켜 콧속을 간지럽혔다. 몸속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정원 앞에 서는 이 순간의 희열이야말로 무협지를 읽는 순간의 기쁨에 비할 만한 유일한 것이리라고, 물뿌리개를 바투 잡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물이 잎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느긋한 동작으로 정원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높이가 2m에 달하는 인도고무나무의 넓적한 잎사귀 뒤에서 웬 남자가 성큼 걸어 나왔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약간의 과장을 보태 선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폭탄 파편을 찾는 중이었어요.”


폭탄이라니, 이 사람 사이코 아냐? 놀란 와중에도 호기심이 동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풍선을 놓친 아이처럼 서글픈 얼굴로 서 있는 그는, 앞집 남자였다.


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여 주었다. 손바닥 위에 자잘한 색종이 조각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게 뭐죠?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좀더 자세히 봐요. 그도 눈으로 대답했다. 색종이 조각마다 색이 입혀지지 않은 뒷면에 깨알 같은 크기로 ‘무영’이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표정만큼이나 처연했다.


“제 이름입니다. 이무영입니다.”


이런.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이 내 이름을 밝혀야 하잖아. 입속으로 인사말을 되뇌어 보았다. 제 이름은 공도영이에요. 아냐아냐, 공혜랑이 좋겠다. 아니지, 공서희가 더 나을까? 긴장해서인지 목소리가 잠겨서 나왔다.


“전 공사이라고 해요.”


빌어먹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의 최대 약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도 모르게 솔직해진다는 거다. 다행히도 남자는 되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폭탄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진짜 폭탄은 아닙니다. 찰흙이랑 계란 껍데기랑 폭죽을 사용해서 만든 모형이죠. 조선 시대의 폭탄인 비격진천뢰를 흉내 낸 겁니다. 제 애인이 대안학교서 공작을 가르치는 교산데, 이거 만드는 법을 알려주더라구요. 그 사람은 잊어버리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내용을 색종이에 써서 폭탄 안에 넣고 터뜨린대요.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나요.”


남자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불안해 보였다. 이마 위로 몇 가닥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 터뜨릴 데도 없고… 옥상이 생각나서 올라와 봤죠. 웬 화단이 있길래 좀 놀랐습니다. 사이 씨가 가꾸는 건가 봐요? 파편이 화단에까지 흩어질 줄은 몰랐는데… 다 치울게요. 미안합니다.”


그럼 잊어버리고 싶은 일이라는 게 바로 당신 자신이었단 말인가요? 라고, 나는 묻지 못했다.


“화단이라뇨? 이건 정원이에요, 공중 정원.”


머쓱해하는 남자를 등지고 물뿌리개를 들어올렸다. 과연 색종이 조각이며 찰흙덩어리들이 정원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내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정원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는 동안, 남자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폭탄의 파편들을 수거했다. 내 물뿌리개 안이 텅 비워졌을 무렵 그의 손바닥 위는 색색의 ‘무영’들로 소복해져 있었다. 그게 왠지 안쓰러워서 나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이름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그 폭탄의 제조법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남자는 내가 폭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정원을 더럽힌 것에 대한 사죄의 뜻이란다. 그간 정원에 들였던 공력과 애정을 생각한다면 장난감 폭탄이 아니라 진짜 폭탄을 구해온대도 시원찮을 판국이었지만, 나는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잊어버리고 싶은 일이 나에게라고 생기지 않겠는가. 폭탄을 터뜨린다고 정말 잊어버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치한 방식으로 잊어버리는 척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자기소개서를 청탁한 이는 여자였고 의외로 끈질긴 사람이었다. 원고료 입금도 이미 끝낸 상태였다.


저는 27세예요. 키는 160cm가 조금 넘구요, 몸무게는 50kg이 조금 안 돼요. 머리는 짧은 커트형이구요, 안경을 써요. 전 혼자 집에 있기를 좋아해요. 전 제 소개를 이렇게밖에 못해요. 독특한 자기소개서가 필요해요. 전 글재주가 없어요. 공사이 님께서 써 주시면 고맙겠어요.


이상이 그녀가 보내 준 정보의 전부였다. 기가 찼다. 이 여자는 정말 이까짓 숫자들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답장’ 버튼을 클릭했다. 다른 정보를 더 보내달라고 쓰려다가 주춤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숫자만큼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도 없는 것 같았다. ‘비가 올 것 같다’라는 말보다 ‘비 올 확률이 70%다’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신뢰감을 주지 않는가. 얼굴이 예쁘장하다거나 성격이 소심하다거나 장래에 뭐가 되고 싶다는 따위의 얘기들이야말로 불확실하고 가변적이고 애매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것들일까.


거울 앞에 섰다. 160cm 남짓한 키에 50kg이 안 되어 보이는 야윈 몸, 짧은 커트 머리에 안경을 쓴 27세의 여자가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오랜만이었다. 나는 거울을 거의 보지 않는다.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이 정말 나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저 유리판 뒷면에 수은을 칠하기만 하면,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나를 볼 수 있는 것일까. 믿을 수 없다. 보라, 나는 너무나 행복한데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저 여자는 내가 아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더 이상 필요한 정보도 없다.


알겠습니다. 한번 써 보겠습니다.


답장을 전송하고 나니 한숨이 나온다. 새삼스레 직업에 회의가 생긴다. 아니다.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원고지 1장당 평균 4000원을 받는 이 일은 나 혼자 살아가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수입원이 돼 준다. 또한 남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일은 즐겁다. 글 속에서 나는 긴 머리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순정파 청년이 되었다가 수채화를 즐겨 그리는 미대생이 되기도 하고, 박애 정신을 가진 사회복지사가 되는가 하면 교수님께 졸업 학점을 구걸하는 만년 복학생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글재주가 없거나 글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글 밖으로 나오면 나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지만 ‘글재주와 글 쓸 시간은 있는’ 공사이가 된다. 글 밖에 있을 때보다 글 속에 있을 때 나는 더 행복하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디서든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글 밖에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잠자리와 밥과 옷이 있고,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와 무협지가 가득 꽂힌 책장이 있다. 게다가 나는 충분히 강하다. 무협지의 주인공들처럼.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지만 풍운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나이들처럼. 고독한 삶이지만 그게 나의 운명이다. 나는 결코 약하지 않다. 그뿐인가. 나에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 두 사람이 한 인물이므로 인간관계 때문에 피곤할 일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나만의 정원이 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독특한 자기소개서란 어떤 유형의 글을 일컫는 것일까. 공사이의 프로필을 보고 내게 글을 청탁할 생각을 했다면 그 비슷한 분위기의 글을 원하는 것일까. 글의 특성상 여러 개를 써서 고객에게 모두 보낸 후 그가 직접 선택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먼저 바탕화면에 ‘자기소개’ 폴더를 만들었다. 자판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들을 부지런히 놀렸다.


이 글은 정말 재미없는 자기소개서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진실하다는 미덕은 지니고 있는 글입니다. 저는 스물일곱 살입니다. 키는 160cm가 조금 넘고 몸무게는 50kg이 조금 안 되지요. 머리는 짧은 커트형이구요, 안경을 씁니다. 못 믿겠으면 우측 상단에 붙여 놓은 증명사진을 보십시오.


무의식적으로 모니터 화면의 우측 상단을 보았다. 증명사진이 있을 턱이 없었다. 헛웃음을 흘리는데 돌연 창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내다보니 웃옷을 뒷목 위로 끌어올려 머리에 뒤집어쓴 자세로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비 듣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소나기였다. 아침에 물을 적게 주길 잘했군. 빗속의 정원 풍경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밖에 비가 오고 있습니다. 제 소개는 잠시 밖에 나갔다 와서 마저 하겠습니다.


우산을 챙겨 들었다.


내가 이 건물의 옥상에 정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넉 달 전, 그러니까 7월부터였다. 당시 나는 직업상의 이유로 ‘바빌론의 공중 정원’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있었는데, 그 고대의 불가사의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상태였다. 마침 주인 부부가 장기 여행을 목적으로 해외에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던 날 밤, 나는 옥상에 올라갔다.


그저 그곳에 정원이 있다는 상상만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달빛이 홀로 점령하고 있는 옥상은 지나치리만큼 호젓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대며 나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아미티스를 생각했다. 어느 순간 주위가 환해지더니 사방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시멘트 바닥에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숲이 우거져 그 한가운데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넓은 옥상을 가득 메웠다. 사막의 태양이 유프라테스 강물 위에 빛의 창날을 뻗치고 있었다.


이튿날, 다시 찾은 옥상은 대낮인데도 괴괴했다. 빗물에 젖었다 마르기를 수차례 되풀이한 듯 꼬들꼬들해 뵈는 담배꽁초 두어 개가 나뒹굴 뿐, 으레 있을 법한 빨랫줄도 하나 없었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이윽고 열쇠공이 도착했다. 옥상은 곧 나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밀 정원이 되었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우산을 곧추세웠다. 비를 맞고 있는 정원은 평소보다 더 푸르고 생기 있어 보인다. 모조리 내 손으로 했었다. 벽돌을 쌓아 정원의 경계를 만들고, 흙이 떠내려가 배수구를 막지 않도록 시멘트 바닥에 배수판을 깔고, 그 위에 다시 부직포를 깐 후 마지막으로 자갈을 깔았었다.


모래와 부엽토(腐葉土), 비토(肥土)를 섞어 이상적인 배합토를 만든 것도 나였다. 여러 종류의 식물을 키우면 서로 해를 더 보고 물을 더 품으려고 경쟁하느라 성장 속도도 빨라진다기에, 수종을 다양하게 고르는 데도 신경 썼었다. 여름 내내 양재동 꽃시장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꽃 도매상가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허공에 떠 있는, 오직 나만을 위한 공중 정원. 그 안에서 내 손으로 심은 나무들이 지금 모처럼의 단비에 몸을 씻고 있다. 옥상의 쇠 난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청량하다.

비격 어쩌구 하던 그 폭탄의 정확한 명칭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였다. 천둥이나 우뢰처럼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적군에게 가 부딪치는 폭탄이라…… 근사한 이름이었다. 임진왜란 때 아군이 이 화기를 사용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격목(檄木)이니 신관(信管)이니 빙철(憑鐵) 같은, 무협지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어휘들이 너무나 정겹고 친숙해서 나는 인터넷 백과사전의 설명을 꼼꼼하게 다 읽었다.

남자가 모형 비격진천뢰를 만들어 온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계란 껍데기 위에 찰흙을 발라 놓은 형태의 공작물로, 윗부분 끝에 완구용 폭죽의 심지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손 안에 쥐니 묵직했다. 안에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무겁죠? 아, 찰흙 때문에 무거운 겁니다. 안에는 피리탄이랑 밀가루밖에 안 들어 있어요. 그는 친절하게도 색종이를 일부러 넣지 않았다고 했다. 나더러 잊고 싶은 일이 생기면 직접 적어서 오려 넣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꼭 효과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남자는 자꾸만 말끝을 길게 늘였다. 저도 그랬거든요. 어영부영 흐려지는 말끝이 떠나기 싫은 사람처럼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도 안 잊혀지더라구요. 말끝을 서둘러 맺는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근데 이 폭탄 어떻게 만드는 거라고 했었죠? 못 본 척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화면에는 쓰다 만 자기소개서가 명멸하는 커서 앞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제 이름은 나중에 밝히겠습니다. 왜냐구요? 도영이라는 이름에서는 복숭앗빛 뺨이 발그레하고 수줍게 웃는 얼굴이 일품인 아리따운 처녀가 연상됩니다. 혜랑이라는 이름에서는 유복한 집에서 금 가지에 옥 이파리처럼 사랑받고 자란 막내딸의 이미지가 떠오르지요. 서희라는 이름은 이지적이고 당찬 한편 겸손하고 사려 깊은 커리어우먼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름은 이렇듯 단순한 음절들의 조합에 불과하지만 결코 단순하게 넘길 수만은 없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억순이나 점례, 끝분이가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외모, 성격의 소유자들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모든 이름은 그 나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이름을 서두에 밝히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이름이 품게 하는 가짜 이미지가 제 실체에 앞서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지요.


남자가 폭탄 제조법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나는 백스페이스 키를 눌러 글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먼저 달걀 한쪽 끝에 구멍을 뚫어서 내용물을 빼내는 겁니다. 그리고는 햇빛에 바싹 말리세요. 한나절이면 됩니다. 다 마른 달걀 껍데기 안에 밀가루를 집어넣고, 아, 밀가루는 그냥 터뜨릴 때 재밌으라고 넣는 겁니다. 음, 밀가루를 넣고 피리탄을 넣고. 참, 피리탄은 낱개로 사려면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가야 돼요. 그다음에 색종이를 오려 넣습니다. 사실 색종이도 터뜨릴 때 예쁘라고 넣는 건데, 뭐 잊고 싶은 걸 적어서 넣어도 상관없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찰흙을 달걀 표면에 덧바르는 겁니다. 이걸 안 하면 폭탄이 너무 가벼워서 폭탄 같지가 않아요. 터뜨릴 때도 파편이 너무 멀리 날아가서 치우기도 힘들어지구요. 어때요, 정말 쉽죠?


남자를 현관문 앞까지 배웅해 준 후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람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성격이지요. 그럼 먼저 제 성격부터 얘기해 볼까요? 저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무협지 읽기와 정원 가꾸는 것을 즐깁니다.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제 성격이 원만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과연 다른 사람들도 이에 동의할까요? 혹시 저를 괴팍하다거나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라고 여기지는 않을까요? 그런 사람도 있겠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요. 그럼 저는 저의 성격을 남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말해 봤자 그건 어디까지나 저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할 뿐이잖아요.


새로 쓴 글도 단번에 삭제해버렸다. 이렇게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넋두리로는 아무 것도 소개할 수 없다. 역시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년월일이나 신장, 체중과 같은 숫자들이나 피부색, 머리 모양 따위의 눈에 보이는 것들뿐일까.


저는…… 저는……입니다.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무협지의 글자들이 문맥을 이루지 못하고 눈 속에서 한자 한자 따로 놀았다. 주인공이 자신의 아비를 죽인 원수와 대적하는 대목에서도 감정이 이입되지 않았다. 피와 살을 가진 사람 주인공은 보이지 않고 흰 종이에 검게 인쇄된 주인공의 이름만 눈에 들어왔다. 무림을 평정한 후에 그는 행복해질까. 어머니 아버지도 모르고 자신의 출생의 배경도 모르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풍운에 몸을 맡긴 채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는 영웅 같은 건, 무협지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책을 덮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 댓잎이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만 들려오던 대나무숲의 풍경은 사라지고 스탠드 불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방안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침대 머리맡에 올려놓은 비격진천뢰가 눈에 띄었다. 문을 나서던 남자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감은 눈에 밟혔다. 그는 무엇을 그리도 잊고 싶었던 것일까…… 잠을 청하면서 무협지 주인공들의 이름을 헤아려 보는 대신 잊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마냥 행복해서일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의식이 더 선명해졌다. 이번에는 반대로 찾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어슴푸레 멀어지고 있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을까. 혼미해졌던 정신이 번쩍 든 것은 무시무시한 굉음이 뒤통수를 후려쳤을 때였다. 그 소리는 머리맡의 비격진천뢰가 폭발하면서 난 것이었다. 건물이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거세게 뒤흔들렸다. 내 정원! 속으로 부르짖었다. 심장이 지축을 따라 요동쳤다. 신도 꿰지 못하고 허둥지둥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정원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초목들 사이에 누워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죽어 있는 나의 얼굴은 거울 속 여자와 똑같이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었다. 나를 아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체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그들은 내 소지품을 뒤졌다. 남의 이름으로 씌어진 수많은 글들이 나왔다. 아직 쓰지도 않은 자기소개서도 있었다. 그들은 내 시신 근처에 흩어져 있던 색종이 조각들도 주웠다. 뒷면에 적혀 있는 것은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는 인칭 대명사였다. 나. 나. 나. 그들은 결국 내 신원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등줄기가 척척했다. 누운 자세에서 팔만 머리 위로 뻗어 보았다. 폭탄은 멀쩡했다. 창밖 어디선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헤집고 지나갔다. 목이 탔다. 혀끝에 닿은 입술이 까슬까슬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같은 꿈을 꾼 것이. 남자가 준 폭탄을 머리맡에 올려놓고 잔 이후로 삼일 연속 악몽을 꾼 것이었다.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는 옷의 주머니를 죄다 뒤져 보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가 한 개 나왔다. 머리 부분에 ‘I-LOCK’이라고 새겨져 있는, 며칠 전에 세탁기 속에서 발견된 구릿빛 열쇠였다. 내 것이 아닌 그 열쇠를 쥐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도 남자는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 그의 제안으로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밤안개에 흠씬 젖어 있는 정원은 이승의 것 같지 않게 신비스럽고 영묘해 보였다. 남자가 달빛을 등지고 서자 그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그림자 위로 포개졌다. 남자는 경탄해 마지않는 얼굴로 구석구석을 둘러보더니 7대 불가사의 공중 정원이 그렇게 신기했느냐고 물었다.


내가 바빌론의 공중 정원에 매료되었던 건 그것이 불가사의여서가 아니다. 거기서 키웠다는 식물들이 현대 과학으로도 열대에선 살릴 수 없는 것들이라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신기하진 않았다. 내가 탄복했던 건 산악 국가 출신인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사막 한가운데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올려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벌과 나비와 새들을 불러 모은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사실, 사랑이고 뭐고 돈과 권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사막에 정원이라니. 나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 화단, 아니 정원은 왜 만든 거예요?”


나도 그런 사랑을 받아 보고 싶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빠, 이름만 기억 나는 엄마는 내게 그런 사랑을 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나 또한 누구에게도 그런 사랑을 준 적이 없었다. 난 그 사랑을 베풀어 보고 싶었고 또 받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황량한 시멘트 바닥 위에 정원을 만들었다. 내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내가 나에게 사랑을 받고. 그 매개가 바로 이 정원이었다.


그러나 사실, 어쩌면 나 또한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자의 흉내를 내 보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너무 심심해서였거나, 혹은 너무 외로워서였는지도.


“그냥, 근사하잖아요. 옥상에 정원이 있다니.”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라 허공에서 흩어졌다. 남자는 허탈하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얼어 있던 안면 근육이 당겨지면서 턱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너무 오래되었다, 내 속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지 않은 지가. 사람이 오래 다니지 않은 산길이 곧 산에 묻혀 버리듯이 표현을 오래 아낀 내 진심도 가슴에 묻혀 버린 모양이었다. 남자에게 물어 보고 싶었다. 난 누구죠? 당신은 누구예요? 당신은 당신이 당신 자신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얇은 옷 안의 팔에 오르르 소름이 돋았다. 팔을 쓸어내리는 손이 시렸다. 양손을 오므려 입김을 불어넣었다. 열쇠를 쥐고 있던 손에서 쇠 냄새가 났다.


“혹시, 얼마 전에 열쇠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보조키를 바꾸는 것 같던데…….”


“애인이랑 헤어졌는데, 그 사람이 내 집 열쇠를 갖고 있었어요. 마음 정리하려고 바꿨습니다.”


옥상에서 남자와 마주쳤던 날 그의 폭탄 속에 들어 있던 색종이들이 떠올랐다, 뒷면에 그의 이름이 씌어 있던. 그는 애인을 떠나보낸 못난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할말이 몽땅 증발된 것 같았다. 그는 치아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쓰지 마요. 이젠 괜찮으니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에 그 사람이 내게 선물한 비격진천뢰가 있었어요. 기념으로 간직하라고 했던 건데, 헤어지고 나서 그냥 한번 터뜨려 봤죠. 잊고 싶어서, 그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안의 색종이에 내 이름이 적혀 있더라구요. 그 사람, 나 때문에 힘들었었나 봐요. 그렇게 오래 전부터 말이에요. 그걸 알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다 사라지더라구요.”


이제는 도리어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 남자는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걸까.


“진짜 폭탄에는 색종이가 아니라 빙철인가 뭔가 하는 쇳조각이 들어 있었다면서요?”


맙소사, 이 주책.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에게는 그 색종이 조각들이 바로 날카로운 빙철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대요. 가슴에 꽂히면 즉사하기도 했다죠. 나는 정원으로 손을 뻗어 애꿎은 몬스테라 줄기만 쓰다듬었다. 그랬을 것이다. 색종이에 씌어진 자신의 이름이 가슴에 꽂히는 위력은 가히 대단했을 것이다. 달리아 꽃 위에 앉은 검불을 떼어내면서 남자를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웃고 있는지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가끔 저절로 알게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콧물을 훌쩍이지도 어깨를 들썩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내, 그가 실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다 큰 남자가 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도 그 사람을 잊으려고 노력해 봤죠. 하지만… 그 사람이 없으면 나도 없어요.”


그의 등을 토닥여 주려고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밤공기가 찼다. 사랑이 이 사람을 있게 했는가. 이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존재로 인해 그 스스로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오한이 났다. 그는 조금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나 혼자 추위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발부리에 걸리는 잔돌을 툭 찼다. 돌멩이는 살짝 찼는데도 멀리까지 날아갔다. 그래도, 그 사람이 있으면 당신도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늘 없는 걸요. 내가 누군지, 내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걸요. 싸늘해진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열쇠가 만져졌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으면, 사람들은 주머니에서 나온 유일한 소지품인 이 열쇠로 내 신원을 추리할까요? 이것이 과연 ‘공사이’라는 한 인간의 내력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문득 그의 주머니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호되게 앓고 난 후의 몸은 가볍고 연하고 파삭하다. 몸뚱이가 허깨비처럼 가벼워지고 연해지고 파삭해지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정원에 올라가지 못했다. 게시판에 올라온 광고 스팸 메일을 삭제하거나 작업에 관한 문의 메일에 답을 하지도 못했다. 일주일 동안 나는 몸과 마음이 다 공황 상태였다. 남자와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밤에 지독한 감기 몸살을 얻었던 것이다.


백여 통의 스팸 메일들을 지우고 나자 딱 한 통의 문의 메일이 남았다.


자기소개서는 언제까지 보내주실 수 있나요? 당장 필요한 건 아닌데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요. 건방진 얘기지만 이번주 내로 어떻게 안 될까요? 부탁드릴게요.


참으로 느긋한 성격에 지극히 공손한 고객이었다. 일을 의뢰한 지 열흘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이제껏 해명의 말 한 마디 없었던 무책임한 장사치에게 이런 애원조의 글을 보내다니. 바탕화면으로 이동했다. ‘자기소개’ 폴더에는 아무것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도저히 쓰지 못하겠습니다. 입금하셨던 원고료는 곧 환급해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짧은 한 줄을 쓰기 위해 나는 몇 번이나 긴 심호흡을 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서너 걸음 비틀거렸다. 벽 모서리를 짚고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몰라보게 핼쑥해진 얼굴은 이전보다 한층 더 우울하고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여러 번 대면했던 기억 때문인지 이제는 제법 친숙하게 느껴졌다.


여자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음을 발견한 것은 파리한 안색이 안돼 보여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차가운 유리 표면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눈앞이 점차 부옇게 흐려졌다.


정원에는 눈에 확 뜨이는 변화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큰 변화가 생기기에 일주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정원에 물을 주면서 나는 차차 확인해 나갈 수 있었다. 상당수 식물들의 잎이 누렇게 변색되었고 줄기는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벌레에 파 먹히거나 오그라든 채 말라 있는 낙엽들이 수북했다. 변화가 아예 없기에 일주일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점퍼 주머니에서 신문지에 싸들고 온 것을 꺼냈다. 비격진천뢰는 표면의 찰흙이 꾸덕꾸덕 마르면서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조금 전에 종이를 오려 넣어서인지 한결 무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성냥갑을 열었다. 잊고 싶은 일과 결별하기 위해서라든가,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식의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성냥불이 심지에 옮겨 붙자 느닷없이 명치 끝이 뜨거워졌다. 불꽃이 심지 위로 화닥닥 번졌다. 가슴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제는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되리라. 불꽃이 도화선 끝에 이르렀을 때 나는 오른팔을 힘차게 위로 내뻗었다. 폭탄을 하늘 높이, 있는 힘껏 던졌다. 세차게 솟구쳐 오르던 비격진천뢰가 허공에서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터졌다. 무수한 파편들이 머리 위로 마구 쏟아졌다.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흰 종이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나풀거리며 정원으로 떨어져 내렸다.


난데없는 함박눈이 흩날리는 사막 한가운데 나의 공중 정원이 우뚝 솟아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들과 탐스러운 열매를 매단 나무들로 진을 친 숲은 울창하고 수려했다. 눈송이가 난분분 떨어져 내리는 강물 위에서는 오색의 꽃잎들이 맴을 돌며 떠다니고 벌과 나비들은 꽃에서 꽃으로 건너다니며 꿀의 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원 안에 있어야 할 내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찾으러 가야 했다. 황금빛 모래에 덮여, 길 또한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헤매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폭탄의 파편이 정통으로 꽂힌 것처럼 가슴이 콱 막혀 왔다.


퍼뜩 눈을 떴다. 여기저기 흩어진 찰흙 덩어리와 종잇조각들로 정원은 몹시 지저분해져 있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러 가기 위해 나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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