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파밭
성 명 : 홍문숙
◇판화=남궁 산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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