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버스에서 일어나는 작은 기적
성 명 : 장은영

1. 달리는 사람들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정해진 노선을 따라 도로를 달린다.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함께 달리면서 저마다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다. 때로는 버스가 신호를 무시하는 찰나의 순간, 모두들 같이 긴장하기도 하면서. 실제로 버스(bus)라는 말이 ‘모두, 한꺼번에’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omnis’에서 비롯된 단어 ‘omnibus’가 줄어서 생겼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모두 함께 어디론가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버스가 대중의 교통수단이 되었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버스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리고 일상의 위험을 같이 공유한다는 점에서 타인과 연관되는 공동체를 경험하는 가장 구체적인 공간 중 하나이다. 우리의 시인들도 일찍이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 운명공동체적인 경험에 시적 상상력을 부여했다. 최두석의 「성에꽃」에 나오는 겨울 새벽의 버스는 나와 타인을 연결해주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겨울날 새벽 버스 창에 피어난 성에는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최두석, 「성에꽃」, 『성에꽃』, 문학과 지성사, 1995)인 것 같아 한 시인의 마음을 애틋하게 만들고, 차가운 버스 창에 이마를 대보게 한다. 흐릿한 버스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의 얼굴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이처럼 버스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 한 개인의 경험은 정치적으로 억압적인 8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를 함께하는 사람들을 향한 화자의 동반자적 시선을 잘 보여주었다.

서민적 삶의 공동체를 보여주었던 공간인 버스는 시대가 변화하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개인들에게 맹목적인 질주를 강요하는 현실이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질주를 계속해야 하는 버스의 운명과 중첩되는 시도 있다. “브레이크가 걸릴 때마다/ 버스는 온몸에서 진저리 치는 소리를” 낸다. “그만 달리라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 속도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 다리를/ 원망하는 소리 같기도”(김기택, 「버스」, 『껌』, 창작과 비평사, 2009) 한 소음 속에서 시인은 새어나오는 “아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버스에 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가열된 속도전이 되어버린 일상 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삶을 공유하게 된다. 시인은 현대인의 개별적 삶에 요청된 속도전이 야기하는 불안과 위험을 그려내고 있는데, 버스를 대상으로 한 이 시는 불안과 위험의 감각을 망각하고 달리는 기계 장치가 되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암울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이 시들이 보여준 것처럼 버스를 타야 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사회적 환경과 시대적 징후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현실 세계의 요구대로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운명이라는 점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개인은 종착지에 대한 확신 없이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액체 근대’라는 말로 바우만이 설명한 것처럼, 모든 견고한 것들이 사라진 유동적 시대에 처해 있는 우리는 삶의 방향성을 잃고 강박적으로 근대적 이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근대사회가 기획했던 이상들, 개인의 해방과 민주주의 정치공동체와 같은 목표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유예되는 갈망의 대상일 뿐 자본주의적 요청 앞에 무력하다. 그럼 과연 이 질주의 끝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희망적 세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희망이란 어떤 형태의 삶인가 그리고 우리는 맹목적 질주 외에 무엇을 할 것인가?

최근 몇 년 동안 벌어졌던 시와 정치에 대한 논의들은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의 운명에 관한 물음과 다르지 않다. 우리 앞에 정해진 노선이 단지 질주를 정당화하는 환상에 불과하다면 삶은 무엇으로부터 의미를 구할 것인가 그들은 물었다. 버스에 관한 시적 상상력을 보여준 심보선 시인은 우리가 “노선을 잃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노선을 잃었다
버스 노선과 정치적 노선
둘 다
(중략)

차창에 기대 노루잠에 빠진다
치어 떼처럼 망막 위를 헤엄치는 빛의 산란
꿈속에서조차 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숨 꾹 참고 강바닥을 걸어 도강(渡江)한다

뒤돌아보면
강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옛 애인

기적처럼 일어났던 사랑을 잃었다
꿈과 현실
둘 다

같은 고백을 여러 번 통과하며
형형색색 분광하는 색
지루함은 나의 무지개
내 그림자는 빛의 정반대
내 언어는 정반대의 정반대

버스는 갈팡질팡 달린다
그래도 좋다

-「미망 Bus」부분

현대인이 처한 불안과 이를 잠재우기 위해 벌이는 질주는 심보선이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이다. 그는 노선을 잃은 버스에 빗대어 지금의 현실을 풀어낸다.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잠시 꿈을 꾸는 화자는 꿈에서조차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방향성을 잃고 노선을 잃은 자에게 기적이란 그가 가야 할 확실한 목적지와 길이다. 그러나 “내 그림자는 빛의 정반대/ 내 언어는 정반대의 정반대”라는 표현이 드러내듯이 당위적인 것에 대해서조차 방향성을 가늠할 수 없는 화자에게 어떻게 확실한 방향성이 가능하겠는가. 그건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제법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방향 찾기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확실했던 노선들이 사라지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화자에게 중요한 건 버스가 “갈팡질팡” 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버스에 탄 운명공동체는 동시대적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버스를 타고 ‘모두 함께’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 현실적 상황은 한 시인의 시세계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심보선의 시가 공동체적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탐색이라고 미리 판단해선 안 된다. 그는 갈팡질팡 달리는 버스가 “그래도 좋다”라고 말한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기 운명과 삶의 방향을 움직이는 어떤 순간이나 존재들에 대한 관계적 사유이다. 물론 그 관계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상황들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보선의 시는 존재론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동시에 운명공동체의 삶이라는 관계망 안에서 읽어나가야 한다.


그림= 김동철


2. 세계의 상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증명이라 여겨질 만큼 언어는 인간에게 막강한 지위를 준 것이 틀림없다. 인간은 말로 명명함으로써 대상을 인식하고 세계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믿어왔다. 사유하는 인간은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고 그것을 확인하면서 근대적 이상향에 다가가고자 시도해왔다. 하지만 정말 세계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어도 될까? 심보선은 언어로 세계를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문제와 결부시켜 묻는다. 아니 무엇을 묻고 있다기보다는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말할 수 없는 “정체 모를 어떤 생각”(「어떤 생각」, 『창작과 비평』, 2013, 봄), “도대체 그 이상하고 모호한 생각”에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고 고백한다. 구체적인 정황은 이렇다. 후배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장례식장에 다녀오면서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 아무런 항변도 못하는 속수무책인 존재임을 문득 느끼게 되었을 때, 시인은 “누군가 너무 빨리 도약했다는 생각/ 누군가 너무 일찍 추락했다는” ‘어떤 생각’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말할 수 없는 죽음의 경험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심연을 감각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필멸성(必滅性)을 지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시인은 죽음의 건너편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자신의 숙명인 죽음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죽음이란 사건에 대해서 언어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시인은 깨닫는다. 규정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감각,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사건은 ‘어떤 생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떠올리게 된 ‘어떤 생각’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설명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지점을 드러낸다. 자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을 숙명으로 지닌 자기 자신이란 것을 깨닫게 된 존재는 더 이상 자기를 확신할 수도 없다. 인간이 언어적 존재라는 것은 오히려 언어를 통해 자기 존재를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 사실은 시인에게 내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 대상에 대한 인식 곧 세계의 확실성도 해체된다는 것을 돌려준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중략)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모서리를 잃은 책상처럼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심지어 그 독하다는 전갈자리 여자조차!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이었다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

- 「슬픔의 진화」 부분

이 시는 하나의 고백과 하나의 선언으로 이루어졌다. 시인 자신의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는 말은 세계의 상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상실도 말한다. 이 시의 화자는 더 이상 자신이 세계와 합일하는 서정적 자아가 아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겐 이 고백이 낯설지는 않다. 이미 2000년대 중반을 지나오면서 한국 시문학은 ‘행복한 서정, 불행한 서정’(권혁웅), ‘서정의 진화’(김수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이른바 미래파 논쟁을 통해 전통적 서정의 의미를 탈주해왔다. 자아와 세계의 불일치와 균열을 통해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라는 전통적 서정 주체를 해체했고, 그 안에서 만끽할 수 있는 새로움을 향유하고 그것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보선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탈서정적 경향과는 다른 지점이다. 심보선의 시적 주체는 세계에 대한 의식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는 주체이지 주체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정적 자아가 아니라는 심보선의 고백은 ‘나는 ∼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잃은 주체라는 의미이며, 그래서 결핍된 주체라는 의미이다. 이 화자는 숙명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상실한 존재이다. 이 시의 화자는 타인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자이다. 그는 자신이 ‘모서리’를 잃은 존재라고 말한다. 언어와 세계가 각각 다른 면일 때, 그 두 면이 만나는 지점이 모서리이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채 진화하는 인간은 세계를 상실한 존재이다. 이 상실감은 슬픔을 야기하는 원인이며, 슬픔은 심보선 시의 주조를 이룬다고 평가될 만큼 중요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슬픔에 계속 머물러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라는 하나의 선언과도 같은 질문은 세계를 상실한 채 질주하는 진화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 선언은 시적 문법의 자율성 또는 미학적 자율성을 근거로 의미의 해체를 유희하는 언어들을 비판하고 있다. 심보선은 자신의 시적 주체가 세계를 상실한 주체라는 점을 고백했지만, 그렇다고 주체는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편의 시를 통해 그가 말한 것처럼 그는 ‘나’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나를 부정하거나 해체해버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성의 자아는 아니지만 세계의 울음소리를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세계 곳곳에서 타인들이 울고 있을 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음을 자신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울음소리는 언어는 아니지만 자신이 만나야 할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신호인 것이다. 이 신호를 통해 심보선의 시적 주체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상실한 주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심보선의 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상실의 주체들은 2000년대 현대시에서 나타났던 혼성적이고 해체적인 탈주체의 양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확신을 지니지 못하는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없는 자,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배제되었음을 인식하는 자, 자기 기원을 부정하는 자들로 등장한다. ‘무국적 고아’나 ‘이방인’,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자들은 상실한 주체의 이미지들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내가 몰래 희망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내가 원래 속죄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나의 이름은
페이도, 와타나베도, 토마스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의 지금은
좀 전의 과거가 제 바로 앞에 내팽개쳐버린
무국적의 고아라는 사실을.

-「외국인들」 부분

교토의 여관에서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후손을 만났네
내가 시를 쓴다고 하자 그는 물었네
오늘 교토의 낯선 아침이 그대에게 영감을 주었는가?
그대가 여기서 말도 안 통하고 매 순간 배제되고
나는 배제되었어요, 라는 말조차 하지 못할 때
그대는 여전히 유머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바로 나처럼 말이지, 하하!

-「The Humor of Exclusion」 부분

한 백 년 만인가여, 기억나세여, 당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지여, 그냥 친근해서여, 전 호부호형 안 해여, 다 어머니라고 해여. 제 삶은 홍길동전과 오이디푸스 신화의 희극적 만남이지여. (중략) 요새는 뭐 하시나여, 전 요새 시 다시 쓰고 있어여, 사실은 아무거나 쓰고, 이거 시다, 그러고 있어여, 엊그저께는 이력서에 사진까지 붙이고, 이거 시다, 이거 이력서 아니다, 그랬지여,

-「여, 자로 끝나는 시」 부분

충족된 자아를 약속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은 더 열심히 질주하라고 충고한다. 현대사회의 성서가 된 자기계발서와 힐링 프로그램 속에서 재사회화(recyclage)함으로써 ‘나’를 찾으라고 안내하고 있다. 현실적 삶의 영역에서 볼 때, 자기 상실이나 방향성의 상실은 혼돈 그 자체이며 자기파괴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재사회화에 실패한 이들―풍요를 얻는 데 실패하거나 아예 풍요를 거부하는 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자본주의는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신성한 공간이 된다. 심보선의 시세계는 이 같은 사회적 이상에 동의할 수 없음을 시적 페르소나들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이 페르소나들은 자기 기원도 모르고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페르소나들은 고백하고, 질문하고, 말을 걸지만 우리는 정말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의 목소리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자신이 목적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자, 배제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자, 그리고 두서없이, 목적 없이 시시껄렁한 농담처럼 주절주절 아무 말이나 하는 화자가 대체 누구인지 의심스럽다. ‘요’도 아니고 ‘해’도 아닌 ‘여’라니, 예의를 갖춘 말인지 아닌 말인지 분명히 모르겠지만 화자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자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심보선의 시에 등장한 상실의 주체들은 희망을 염원하고, 속죄하고, 누군가를 향해 질문하고 ‘말을 건다’. 이제 우리는 이 행위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 행위가 무엇인지는 이미 화자가 말하고 있다. “전 요새 시 다시 쓰고 있어여”라는 말에는 누군가를 향해 말을 거는 화자들의 모습과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가 오버랩된다.

3. 너를 부르다

심보선은 인간이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자주 드러낸다. 나아가 그의 시쓰기는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말들」)를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 존재에 관한 그의 관심이 드러난다.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건 인간이, 언어로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무(無)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본질이 미리 주어진 존재가 아니기에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無)라고 이야기한 사르트르의 존재론을 참조해 볼 때, 심보선이 말하는 영혼은 인간이 지닌 무를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인간은 사물과 다르다. 변하지 않는 자기 본질을 내재한 사물과 달리 인간은 본래적 의미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는 타인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는 대자(對自)적 존재이다. 타인은 곧 나에게 자신을 알게 해주고, 세계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선행 조건인 것이다. ‘나’는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타인은 언제나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인간은 영혼을 지닌 존재기에 ‘너’라는 인칭의 타인과 ‘나’ 사이에는 무 또는 심연이 놓여 있다. 서로 대칭적 위치에 놓인 것처럼 ‘나’와 ‘너’는 동일한 하나가 될 수 없다.

‘나’와 ‘너’ 말고도 수많은 단어들은 자신의 반대말을 가지고 있다. 삶과 죽음, 결혼과 이혼(「휴일의 평화」)처럼 서로의 반대편을 의미하는 것 같은 말들이 있다. 중력이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자기편의 단어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두 세계는 나와 너의 경우처럼 다른 한쪽과 통합되지 않는다. 두 세계 사이에는 “무(無)”가 놓여 있다. 그러나 심보선은 “두 줄기의 햇빛/ 두 갈래의 시간/ 두 편의 꿈/ 두 번의 돌아봄/ 두 감정/ 두 사람/ 두 단계/ 두 방향”(「둘」) 사이에 “무(無)”와 동시에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시인은 모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불가능성 안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인데, 규정될 수 없는 타인의 존재 즉 ‘무’로부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어떤 방법으로 영혼의 증거들을 보여줄 수 있을까. 심보선은 상실한 주체들의 말하기로서 고백하기, 질문하기, 이상하게 말하기 등의 언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또 다른 언술의 유형을 보여준다. 그는 편지쓰기(「H.A.에게 보내는 편지」), 청혼하기(「인중을 긁적거리며」), 구애하기(「Mundi에게」) 등을 통해 ‘너’라는 타인이 거기 있다는 확신을 표명한다. 항상 타인은 내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쪽 세계에 있다는 점, 달리 말하면 불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관계의 표현은 너를 부르는 일이다.

당신이 쓴 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나로 하여금 단번에 당신을 사랑하게 만든 그 매혹적인 글을. 영혼에 관한 글이었던가요? 세상의 모든 글은 영혼에 관한 글이라고 믿습니다. (중략) 이제 제가 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당신은 오래전에 죽었으니까요. 당신의 육신은 흔적 없이 사라져 우리 사이에는 혼혈아도 고양이도 베고니아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맞출 수 없다는 사실을 축복이라고 믿어야 하나요? 지금 나는 당신이 담배를 물고 있는 흑백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물어봅니다. 탁자 위로 낯선 향유 냄새를 끝없이 피워 올리는 촛불로 담배를 붙이고 나면 나는 그 불로 마지막 문장 하나를 남긴 이 편지도 태울 것입니다. 그것이 이 편지가 그대에게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으니까요.

-「H.A.에게 보내는 편지」 부분

심보선의 시에서 ‘너’를 향해 다가가려는 화자의 모습은 모리스 블랑쇼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해 보자. “그녀에게 나는 영원히 말한다. ‘이리 와.’ 그리고 영원히 그녀는 여기에 있다.”(모리스 블랑쇼, 고재정 역, 『죽음의 선고』, 그린비, 2011. 102.)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을 부르는 것은 이미 죽은 그녀로 하여금 응답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네가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고 너를 부르는 일, 너와 함께하기 위해 너에게 다가가는 일이다. 언제나 ‘너’는 영원한 무에 속하므로 나에게는 ‘눈앞에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만나야 할 ‘모서리’이다. 너를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세계를 상실한 자로 남는다. ‘나’라는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에도 그것이 내 인생에 “주어진 유일한 선물”(「‘나’라는 말」)임을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청혼한다. ‘나’의 말은 너에게 도달할 수 없겠지만 너를 부름으로써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시간이 너라는 모서리에 닿기 위해 흘러가고 있을 때 지나간 것은 과거가 되고 앞으로 지속될 삶은 미래가 된다. 바우만의 말처럼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신뢰는 필멸성과 불멸성의 간극을 메꾸는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무 또는 심연을 떠올리게 하는 “무의미한 죽음”(「인중을 긁적거리며」)을 밀어내고 나의 삶은 필연적이라는 신뢰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게 한다.

시인으로서 심보선은 현재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시 속에서도 ‘지금 여기’라는 순간을 환기한다. 맹목적 질주를 멈추는 질문들을 던지는 ‘지금 여기’에 관한 사유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명상, “어떤 생각” 등의 시 제목을 통해서도 환기된다. ‘지금 여기’에 관한 그의 사유는 사회학적이고, 비평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시집 곳곳에 있는 문장들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해 볼 수도 있다. 자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성애자 중산층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계급적인 진술(「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 「사랑은 나의 약점」), 유물론과 법은 치안 영역에서만 성립할 뿐 이방인에게 유물론자는 모순적이고, 법은 차갑다는 논평(「노스탤지어」), 사랑하는 우리의 미래를 선취하기 위해 가능성을 꿈꾸고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선언(「먼지 혹은 폐허」,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등을 마주치게 되는 경우는 많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관한 사유는 존재론적이기도 하다.

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중략)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는다
신은 얼마나 많은 도형을 이어 붙여
인간의 영혼을 만들었는지!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하기 위하여
無에서 無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

-「지금 여기」 부분

시적 사유의 대상으로서 ‘지금 여기’는 ‘영혼’을 가진 인간의 거주지로 그려진다. 그것을 시인은 삶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심보선에게 시적인 것은 “無에서 無로 가는 도중”에 처한 인간의 삶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의 삶은 신이 만들어준 영혼을 증명하기 위한 시간이다.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며 껴안을 때 신이 만들어준 영혼은 증명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초라한 간이역”에 왜 머물겠는가. 이 화자에게 삶의 목적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음을 나누기 위하여 인간을 사랑하는 것, 인간을 껴안는 것이다. 이 행위는 언어적 소통을 넘어서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시적인 것이다. 요컨대 심보선에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시적인 사건이며,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부르는 행위는 시쓰기에 다름 아니다.


그림= 김동철

4. 타인 그리고 도래할 미래

심보선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꿀 뿐”(「먼지 혹은 폐허」)이라고. 그는 상실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인이지만 그의 슬픔은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학에 빠진 우울증 환자의 모습과는 다르다. 심보선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를 부르고, 구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너’라는 타인 없이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임을 알고 있다. 이 화자들에게 너라는 타인은 자기 삶의 조건이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 없는 생을 향유하는 중이다.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이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도래할 미래를 신뢰하게 한다. 바로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버스의 노선이 각자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환상은 이제 버려도 좋을 것 같다. ‘지금 여기’라는 삶의 공간을 허무와 냉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함께 있음을 공유하는 타인들이지 유예되는 이상과 가치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결정적 증거이다. 우리가 탄 버스는 함께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에 희망적인 공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슬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심보선의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 지성사, 2008),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 지성사, 2011) 그리고 최근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함. 제목만 표기된 경우는 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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