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 없음
   
올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은 없습니다. 판에 박힌 듯한 요즘 시 창작 경향에 경종을 울리고, 새롭게 다시 출발하자는 의미에서 한국 문단의 두 원로 심사위원께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그동안 세계일보 신춘문예가 배출한 훌륭한 시인과 작품도 많았지만, 더 나은 문단의 창작 풍토와 기풍 쇄신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당선작 없는 정초의 신춘문예 면에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와 활발한 시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영남 시인의 신춘문예에 대한 고뇌와 열정이 담긴 작품을 게재합니다. 


그림=남궁산(판화가)


신춘문예(新春文藝)는 알고 있다

김 영 남

신춘문예에 당선돼 시인이 되면 나는 그때

호미, 삽을 대학 팔차 학기 끝날 무렵 다시 든 부모님께 제일 먼저

고추처럼 매운 시 한 수를 바치리라 다짐했다.

일류회사 중역 꿈꾸며 교문을 빠져나가는 대학 동창들.

그리운 모습들 모두 곁을 떠났을 때도 나는

삐걱이는 강의실 책상에 버려진 볼펜처럼 홀로 남아

원고지 구멍을 메우고 빈혈의 사연을 고향에 부치면서

남도의 제일 가는 서정시인으로 떠오르리라 다짐했다.

지난가을 전지(剪枝)한 덩굴장미가 새로 자취방까지 기웃거리고

언제쯤 졸업사진 찍어낼 수 있겠느냐는 부모님 기별이

철 지난 나뭇잎처럼 날아들 땐

느렛골 파밭에서 언 땅을 파고 계신 어머님의 구부정한 허리가 보였고,

대밭에서 후박나무 밑동을 쓰러뜨리는 아버님의 다리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종일토록 휴지통 가득 버려진 니코틴 그을린 시간들.

그해 겨울 마지막 잎새처럼 남은 생활비마저 하루 두 끼로 줄어들었을 땐

나는 세상의, 문학의 버린 자식으로 흑석동 싸늘하게 살아남아

시인이 될 수 없는 시인들 신분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글이 될 수 없는 글의 심사위원들까지 부정했다.

매번 패배의 변(辯)과 야멸찬 다짐으로 가득 찬 대학노트,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쓰라림을 삼키면서도 나는

고추처럼 매운 시 한 수를 바치리라 다짐했다.


>>김영남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 밤의 여로’ 등이 있음.
  윤동주문학상, 중앙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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