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역사의 폐허를 재현하는 실재의 시선
  -편혜영과 백가흠의 소설’
성 명 : 서희원
1. ‘초과’하는 이미지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 ‘나’는 친구 ‘쥐’가 보내온 소설에 대해 “쥐의 소설에는 탁월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은 섹스 신이 없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 소설이 가진 미덕을 설명한다. 섹스와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에 대한 ‘나’의 지적은 현대예술이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소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반증이며, 현대예술이 창조적 영감을 발견한 특정한 지점을 알려준다. 섹스에 대한 과감한 묘사는 빅토리아 시대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엄격한 사회적 분위기에 규율되었던 인간의 육체와 감각을 해방시켰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과 같은 소설은 당대엔 포르노그래피로 평가되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 육체를 규율하는 이데올로기에 속박되어 있던 인간 본성의 분출로 재평가되었다. 현대예술에서 죽음은 단지 한 개인의 실존만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밝혀지는 사회적 구조로 확대되었다. 죽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또는 죽음을 동반하는 부조리한 장면을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해석을 견인한다. 표현적으론 섹스와 죽음, 인물적으론 광인, 범죄자, 패륜아에 대한 현대예술의 열렬한 지지는 특정한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 의지의 표상이었으며, 주어진 삶의 조건이나 체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현대예술은 이러한 ‘초과’에 대한 열광을 통해 이전 시대의 것들과 스스로를 변별했다.

여기서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 즉 초과(超過)의 운동성만을 취한 것이 대중문화이다. 재장전 없이도 끊임없이 총알을 쏟아내는 총, 배우들의 거대한 육체와 스테미너로 표현되는 사랑, 혈관과 장기를 헤집는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묘사들, 비현실적인 부의 재현과 소모에 가까운 소비. 대중문화는 TV, 영화, 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목적과 방향이 소거된 ‘초과’의 자극적 재현에 몰두하며, 대중은 ‘초과’에 대한 광적인 환대로 이를 일상적으로 소비한다. 이런 재현에 익숙해진 관객은 더 이상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 도착’을 보며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라는 가상의 안전벨트마저 소거된 스너프 필름(snuff film)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한국문학에 등장한 편혜영과 백가흠은 대중문화적 표현에 익숙한 독자들도 쉽게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죽음과 섹스에 대한 강박증적 ‘초과’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제시한다. <주1: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편혜영과 백가흠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편혜영,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 2007), ‘산책’(‘문학과사회’2008년 봄호) ; 백가흠,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 ‘조대리의 트렁크’(창비, 2007), ‘그런, 근원’(‘문학과사회’ 2008년 봄호). 본문에 인용할 경우 작품명만 표시하겠다.>

먼저 편혜영의 소설을 보자. “그녀는 마취된 고양이의 배를 잘도 갈랐다. 붉은 피로 둘러싸인 내장들이 여전히 벌떡벌떡 뛰고 있었다. (……) 마침내 복강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 누이는 복강 안으로 손을 넣어 쓸개며 위장, 신장 따위를 만져댔다. 부러운 나머지 피로 붉게 물든 누이의 장갑을 쳐다보았다. 복강에 손을 넣어, 그리하여 따뜻한 혈관에 둘러싸인 내장을 보게 되면 나라도 그것들을 만져보고 싶을 터였다. (……) 떼어낸 자궁은 금세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아오이가든’) 편혜영의 소설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집의 어느 곳을 펼쳐도 이와 동일한 이미지들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오감을 자극하며, 구역질을 유발시키는 이런 묘사를 견디기 위해서는 특정한 맥락이 필요하다. 이런 장면을 요구하며, 때론 당연한 것으로 이해시키는 서사가 바로 그것이다. 날카로운 칼을 담는 단단한 칼집처럼 안정된 서사 안에서 과도한 이미지들은 소비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편혜영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은 짐작하기도 어렵고, 역병과 죽음의 원인은 풍문처럼 떠돌며,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편혜영의 다른 소설인 ‘저수지’는 시체를 찾는 수색대의 모습과 유기된 아이들(시체들)의 웅성거림이 서사의 전부이다. ‘아오이가든’의 인물들은 집 밖을 나가지도 못한다. 왕피천에서 떠오른 시체에서 출발한 ‘문득,’의 서사는 죽음 이후 일상을 살아가는, 원한도 없는 여인(유령)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서사가 이미지를 포함한다기보다 오히려 이미지가 서사를 이용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렇다면 백가흠의 이야기는 어떤가? ‘배꽃이 지고’는 장애인 학대와 아동 살해라는 끔찍한 소재를 경어체 문장으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퇴락한 농촌에서 과수원을 경작하는 중늙은이 사내는 “하얀 배꽃이 눈처럼 흩어”지는 풍경 속에서 일급 장애인 병출에게 모진 매질을 하며 그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병출의 아내인 개순을 상습적으로 겁탈한다. 과수원 일을 하러온 일꾼에게 일당 대신 개순의 육체를 제공하고, 자신의 관절염 약이라고 개순의 젖을 탐하는 늙은 사내의 모습은 일반적인 탐욕의 형상화를 초과한다. 특히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르는 개순의 아이를 마루 위로 집어 던져 죽이고, 이를 병출과 함께 묻는 장면은 기괴함을 넘어 상황에 대한 공포, 서사에 대한 분노까지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소설의 결말은 장애인 실태조사를 나온 공무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보조금을 받고, 과수원 대숲에서 개순이를 겁탈하는 늙은이, 이를 지켜보는 병출이의 모습으로 끝난다. 다른 소설은 어떤가. ‘웰컴, 베이비!’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퇴락한 웰컴 모텔의 객실에서는 각자의 불행이 싹트고, 입 밖에 없는 유기된 아이를 안고 빈젖을 물리는 동성애자의 웃음과 204호에서 선풍기에 목을 매는 사내의 모습이 병기되어 결말로 제시된다. ‘굿바이 투 로맨스’에서 사내에게 감금된 두 여인은 가학적인 성행위와 폭력이 주는 치욕을 담담하게 받아 넘기며 지옥 같은 방안에 누워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든다. 이는 폭력이나 부조리에 저항하거나 사회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문학적인 결말을 기대한 독자에게 먹먹한 충격을 준다. 소설의 완결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는 사회화라는 특정한 방식에 속한 것이다. 불균등과 착취, 폭력은 사회를 통해 단죄되어야 하며, 범죄자는 처벌 받아야 한다. 소설이 사회의 구조에 대한 미메시스인 이상 사회화의 경계를 넘는 소설은 위험하다.

분명한 것은 편혜영과 백가흠의 소설이 현대 사회가 문학을 소비하는 방식을 초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편혜영의 묘사는 너무 끔찍하고, 서사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백가흠의 폭력은 과도하며, 서사는 쉽게 사회로 봉합되지 않는다. 악인은 처단되지 않고, 모든 폭력이나 패악은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순환된다. 이들의 소설은 기존의 소설을 읽는 방식에 대한 위반(違反)의 독법을 견인한다. 문명화된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에 대한 불안, 사회화의 경계 밖에 위치한 하루하루가 지옥과 다름없는 삶, 보편적 주체에서 탈각된 인간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 편혜영의 서사는 충족되고, 백가흠의 소설은 완결된다. 이들은 말한다. 현실의 단단한 그물을 찢고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실재를 보라고. 이 소설을 해석하기 위해 현실(reality)을 참조하지 말고, 실재(the real)의 틈새를 통해 바라보라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진정한 현실이라고. 정확히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2. 편혜영, 실재를 통한 현실의 전복



편혜영이 ‘아오이가든’에서 구축한 공간은 분명 낯설고 기괴하다. 유래(由來)를 찾을 순 있지만 유사(類似)를 찾을 수 없는 이 공간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하드고어 원더 랜드”<주2: 이광호,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 랜드-편혜영 소설과 모더니티의 엽기전’, ‘아오이가든’, 문학과지성사, 2005.>와 같은 별칭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간을 이해하기 위한 로드맵으로는 최근에 발표된 소설 ‘산책’이 유용하다. ‘산책’의 주인공 ‘그’는 생산공장이 있는 지사 근무를 제안 받는다. 임신한 아내도 이것이 경력과 승진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동의한다. 그와 아내는 “익숙하고 편했지만 무신경해도 티 나지 않을 만큼 재미없고 지루”하던 일상이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사장이 소개한 111번지를 찾아 구획 정리가 잘된 주거지를 헤매지만, 그들이 이사갈 집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지사장과의 통화를 통해 “111번지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고 109번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09번지의 지하를 통과한 후 도착한 111번지에서 그와 아내는 현실을 전복하는 불안한 실재의 단편들과 조우한다. “실재한다는 실감이 없”지만 멧돼지의 울음소리는 그에게 불면의 밤을 선사하고, “사람 그림자 한 번 문 적이 없는 개”에게 아내는 지옥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의 이미지를 읽고 두려워한다. 불면과 불안은 가정과 직장을 잠식한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는 그리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109번지에 사는 후배에게 멧돼지 울음소리를 들었냐고 묻지만 후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숙취를 말한다. 현실에서 개는 충실하고, 멧돼지는 인간의 주거지에서 격리되어 있지만, 이를 실재로 느끼는 순간 개는 이빨을 드러내며 짖고, 멧돼지의 울음은 일상을 틈입한다. ‘아오이가든’에 펼쳐진 기괴한 공간이 전면화된 실재의 세계라면, ‘사육장 쪽으로’의 세계는 현실에 틈입한 실재의 감각이 현실을 파괴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과정을 담고 있다. <주3: 신형철은 ‘실재의 미학’에서 ‘실재의 정치학’으로의 편혜영의 작품이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실재의 정치학’은 낯익은 것(일상)을 낯선 것(악몽)으로 전화시키는 방식을 지칭한다. 신형철, ‘섬뜩하게 보기’, ‘사육장 쪽으로’, 문학동네, 2007.> ‘소풍’에서 여자와 남자의 여행을 잠식하는 안개, ‘사육장 쪽으로’에서 전원주택에 살고 싶은 일상의 욕망을 파괴하는 개의 이빨과 울음소리, ‘분실물’에서 인물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안경의 분실 등은 109번지(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111번지(실재)로 인도하는 장치들이다.

편혜영에게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는 “기계처럼 균일하게”(‘산책’) 작동되는 안정된 공동체가 아니다. 사회는 하나의 픽션(fiction)이며 평등, 자유, 분배, 합리라는 단어의 공통적 감각 위에 구축되었다고 여기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에 불과하다. 서로가 공평하게 숙지하고 있고, 균등한 기회가 주어진다고 믿고 있는 사회적 제도들은 ‘금요일의 안부인사’에 나오는 카드게임과 같다. 서로 경제적 지위도, 가정 형편도 다른 세 명의 사내 ‘김’과 ‘박’, ‘조’는 매주 금요일 ‘김’의 집에서 카드게임을 하며 밤을 보낸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조’의 치킨집이었다. 막연히 술 한 잔 더하자고 ‘김’은 ‘박’과 ‘조’를 자기 집에 초대했지만, 그들 사이엔 대화가 오가지 않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그들은 카드게임을 시작한다. ‘박’에 의하면 카드게임은 “서로 다른 무늬와 숫자를 사용해서 여러 가지 변수들을 경제적으로 다루는 게임이죠. 집약적이고 정교해요. 게다가 창의적”이다. 그들이 친교의 매개로 삼고 있는 카드게임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상징한다. 하지만 ‘김’의 딸이 마루에 떨어져 있는 “하트 에이스” 카드 한 장을 내미는 순간, 견고한 사회적 규칙은 깨어진다. “이게 왜 마루에 떨어져 있죠? 누가 숨겨놓기라도 한 건가?” 게임을 하는 도중에 바닥에 떨어진 것일 수도 있는 한 장의 카드가 전체 게임을 전복하는 것이다. ‘김’의 딸아이가 내민 한 장의 카드는 사회의 시스템(카드 게임)에서 탈각된 것일 수도, 아니면 교묘하게 시스템 전반을 지배하기 위해 감춰진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현실의 단단한 그물을 찢는 실재이다. 실재가 현실과 다른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것이 시스템의 일부이고, 시스템에서 탈락된 것이며, 혹은 시스템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감춰진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전복된 카드 게임을 앞에 두고, ‘김’은 안절부절못하며, ‘조’는 불안해하고, ‘박’은 흥미로워 하지만, 누구도 카드를 뒤집어 현실에 틈입한 한 장의 카드가 알려주는 실재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들이 나누었던 친교는 가상의 우애로, 게임을 지배하는 것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든 상대방을 이기고 싶다는 천박한 욕망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제 ‘아오이가든’ 이후 편혜영이 친절하게 설명한 로드맵을 숙지했으니, 그 길을 따라 “하드고어 원더 랜드”로 들어가 보자. 이곳은 문명의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이며, 역겨운 시취(尸臭)와 끔찍한 질병, 참혹한 가난이 일상처럼 만연한 곳이다. “아오이가든”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저수지’이다. 여학생의 실종을 알리며 ‘저수지’는 시작된다. 여인들의 실종은 더욱 빈번해지고, 그들의 사체는 발견되지 않는다. 저수지 근처를 뒤지던 수색대원들은 저수지 한가운데서 “기다란 생물체”를 목격한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흐릿하고, 불분명했으며 비현실적인 형체를 띠고 있었다.” 대원들은 그들이 본 것을 부정하고, 이를 저수지의 “시커먼 물”과 짙은 “안개”를 통한 착시라고 판단한다. 저수지 속의 생물체가 현실을 결절하고 그 간격을 벌리는 순간, 문단은 단락되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판단이 되지 않는 세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된다. 이들은 “현실감 없는 생물체”를 “괴물”이라고 지칭한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난 “엄마”에 의해 유기된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비현실적이며, “시궁쥐 냄새”와 “화상”으로 썩어가는 육체의 묘사는 끔찍하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 수색대에 의해서 밝혀지듯이 이 아이들은 “썩을 대로 썩어버린 시체”들이다. 실재(괴물)는 현실에 “순간적이고, 흐릿하고, 불분명하게” 등장하지만, 실재가 만든 현실의 틈으로 방갈로 속에 유기된 시체들의 진실이 서사 전면으로 등장한다. 아이들의 역겨운 입냄새와 방갈로를 진동하는 시취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버려진 아이들이 죽어가는 순간 남긴 고통의 흔적이며, 끔찍한 세계의 진실이다.

‘아오이가든’에서 현실에 균열을 가하는 실재는 “역병”이다. 역병이 출몰하자 도시는 언제 문명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폐허로 변한다. “도시 전체를 내다버린 것처럼 많은” 쓰레기가 거리를 채웠고, 하늘에선 “시커먼 개구리들이 비에 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시 전체가 부식되면서” 풍기는 악취는 구역질과 편두통을 일으킨다. “아오이가든”은 철저히 고립된 공간이다. “팔 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온 누이는 임신을 하고 있으며,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폐경기가 지난 늙은 어미는 생리혈을 집안에 묻히며 돌아다닌다. “연하면서도 깊고, 화려하면서도 더러운 색”이 도는 늙은 어미의 생리혈에서는 “거울을 흐리게 하고, 칼날을 무디게 하고, 유리 접시에 금을 내고, 점토 아래의 지렁이를 불러 모으고, 다락의 쥐들을 미쳐 날뛰게 한다는 냄새가 났다.” 집안은 죽음과 부패, 광기와 공포,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자궁을 적출당한 고양이는 ‘나’의 뱃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누이는 “가늘고 몸통이 큰 개구리”를 낳는다. 늙은 어미는 베란다 유리창을 열고 누이의 아이들인 개구리를 쏟아 버린다. 나는 “붉은 내장”을 쏟아내며 쓰레기가 가득한 거리로 떨어진다. ‘아오이가든’의 대강의 내용이 환기하고 있는 것은 “역병”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통해 격리된 공간이 만들어 내는 인간들의 공포와 광기이다. 실재(역병)가 전면적으로 등장하자 문명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우애나 가정, 사랑 등으로 지칭되던 단어는 즉각적으로 가면을 벗어 그 단어 뒤에 감춰둔 시취와 살의, 폭력을 들이민다. 편혜영에게 문명이란 ‘저수지’의 범죄, ‘마술피리’의 가난, ‘아오이가든’의 역병, ‘문득,’의 폭력을 사회 외부의 것으로 감추는 시스템의 자기 건강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가가 창조한 악취와 야만의 세계는 부르주아 문명이 감추고 있는 진실의 모습이며, 이는 실재가 만드는 균열을 통해 그 모습을 보인다.



3. 백가흠, 폭력과 섹스를 재현하는 무심한 카메라의 시선



“남자는 육중한 엉덩이와 벌겋게 벌어진 여자의 음부를 보며 손으로 자신의 것을 애무한다. 여자는 고개를 모로 돌려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창을 빠져나가 달구분식으로 전해진다.

달구의 늙은 노모가 달구에게 매를 맞고 있다. 노모의 검버섯 곱게 핀 뺨이 벌그죽죽하다. 바람횟집의 남자가 막 여자의 질 안에 삽입을 시작했을 때, 달구분식의 노모는 가지런히 쪽 찐 머리가 일순 헝클어지도록 세차게 귀뺨 한 대를 아들에게 얻어맞았다. 천장으로 넘어온 여자의 웃음소리는 가는 신음소리로 변하고 있다. 바람횟집 여자는 자신의 신음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엎드려서 손으로 입을 막고 있다. 달구의 노모도 비슷하다. 손으로 입을 막지는 않았지만, 어금니를 단단히 물어 거친 숨소리만 코로 새어나온다. 두 집의 여자들이 자신의 신음소리를 막는 이유는 서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혹 들을지도 모를 이 집 밖의 사람들 때문이다.” (‘귀뚜라미가 온다’)



인용한 대목은 백가흠의 단편 ‘귀뚜라미가 온다’의 일부분이다. 원래 무인도였던 능도(陵島)가 관광지로 개발되자 이곳에 몇 개의 횟집과 모텔, 슈퍼가 생겼다. 이곳에서 바람횟집을 운영하는 살찐 여인과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며 동거중인 젊은 사내가 있다. 그들의 횟집은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달구분식과 맞닿아 있다. 달구분식에는 술만 먹으면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노총각 달구와 노모가 살고 있다. 이들은 섹스의 교성과 폭력의 신음이 혼재된 삶의 변방에 놓여 있다. 섹스만이 소통의 전부로 보이는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내는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릴 희망을 꿈꾸며, 달구의 노모는 바람횟집의 여인에게 얻은 졸복의 내장으로 담근 젓갈을 이용해 동반자살을 계획한다. 한 지붕 밑의 두 세대가 가진 가정의 희망과 동반자살만이 해결책인 절망은 등을 맞대고 공존하는 최하층계급의 사회적 상태를 보여준다. 이들의 희망과 절망은 태풍이 접근하고 있는 능도의 풍경처럼 위태롭다. 결국 섬으로 차올라온 바닷물에 의해 달구의 노모는 죽고, 여자마저 파도에 떠밀려 바람횟집과 함께 바다로 사라진다.

‘귀뚜라미가 온다’에 등장하는 이들은 백가흠 소설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백가흠은 마르크스에 의해 사회를 변혁시킬 보편적 주체로 상정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보다 더 하층에 위치한 정치적·경제적 변방의 인물들을 소설에 등장시킨다. 인터넷을 통해 매춘을 하는 여자, 비정규 노동자, 정신적 또는 신체적 장애인, 쓰레기가 가득한 방에 유기된 아이, 고아, 동성애자, 범죄를 저지르고 외국으로 달아난 선원, 폐품수집으로 생계를 연명하며 철거를 앞둔 연립주택의 반지하방에서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노인, 가학적인 남성에 의해 연금되어 모진 매질과 치욕을 견디는 여인 등이 이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백가흠은 이들이 처한 참혹한 사회적 환경을 무심하게 묘사한다. 보통의 소설이 사건과 인물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백가흠은 이들의 처참한 일상과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의 세목들을 무심하게 보여준다. 백가흠이란 관찰자가 카메라로 포착한 것 같은 인물들의 자잘한 모습은 독자들에게 건조하다 못해 차가운 느낌을 준다. 이러한 보여주기 기법은 이 작가가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인용한 ‘귀뚜라미가 온다’의 대목은 섹스와 폭력의 움직임을 분절하여 하나의 장면으로 제시한다. 이들의 상이한 행위는 바람횟집에서 달구분식으로 ‘이동하는 시각(shifting perspective)’과 장면의 교차배열을 통해 얇은 벽을 사이에 둔 동시적 상황으로 제시된다. 섹스와 폭력이, 애욕과 적의가 동일한 청각적 효과를 통해 하나로 합쳐지며 독자에게 증폭된 감정을 전달한다. 이는 몽타주(montage)라고 부르는 기법의 문학적 활용이다. <주4: 영화적 기법의 소설적 활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황종연의 글 ‘탈승화의 리얼리즘-윤성희와 천운영의 소설’(‘문학동네’ 2001년 가을호)이 좋은 참조가 된다.>

백가흠에게 소설이란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시선에 의해 포착된 장면들의 조합이다. 그는 비루한 인간 군상들의 세목들을 설명하고, 인물들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소설가가 아니다. 백가흠은 사회에서 배제된 인물들의 세세한 일상을 따라가며, 이를 사진 찍듯이 포착하고, 연속적으로 배열하며, 특정한 효과를 위해 편집한다. 이러한 백가흠의 소설 기법은 인물이나 사물의 진실을 설명하는 일반적 소설의 방식에 대한 거부를 반증한다. 인간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말해질 수 없다. 특히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설명할 어떠한 사회적 언어도 소유하지 못한 최하층의 빈민들은 더욱 그러하다. 오로지 그들은 표정과 몸짓, 행동이 만드는 가시적인 장면을 통해 재현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작가의 소설에 유독 언어장애, 사투리, 말더듬이, PC통신 말투, 하층민의 은어·속어 등을 사용하는 인물이 많은 것은 이런 점에서 자연스럽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표현에 따르자면 백가흠의 인물들은 하위주체인 ‘서발턴(subaltern)’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작가는 스피박이 비난 받았던 방식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백가흠은 스스로 서발턴의 심리와 상황을 대변하는 중개자라고 상정하지 않으며, 이들의 세목을 무심하게 묘사한다.

이런 가시적 효과에 통한 영화적 작법은 백가흠의 다른 소설 ‘웰컴, 베이비!’에서 보다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26개의 소단락들은 동일한 맥락에 의해 조합된 각각의 시퀀스(sequence)이다. 이 소단락에 제시되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상황 등은 쇼트(shot)에 해당하며, 이런 영화적 기법에 맞게 백가흠은 냉정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포착된 사물과 인물들을 묘사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퇴락한 “웰컴 모텔”은 각기 다른 방안에 제각각의 불행을 간직한 비참한 인간들의 사회이다. 동성애자이며 모텔을 운영하고 있는 ‘미스터 홍’, 이런 그를 사랑하는 종업원이자 현재의 애인인 ‘재영’, 여관방의 옷장을 전전하며 어른들의 성교를 엿보는 아이, 동네 피씨방을 돌아다니며 게임대회의 상금으로 연명하는 201호의 부부, 윤락녀를 호출해 섹스를 하는 204호의 남자. 이 경제적으로, 젠더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정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들은 퇴락한 웰컴 모텔에서 어두운 삶을 살아간다. 재영은 옛 애인의 아이를 기르며 그를 잊지 못하는 미스터 홍의 곁을 떠나고, 임신중독증에 시달리던 201호의 부부는 입 밖에 없는 기형아를 변기에 낳고 사라진다. 미스터 홍은 사라진 부부 대신 침대 밑에 유기된 아이에게 빈젖을 물리며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는 204호실의 남자가 선풍기에 목을 매는 광경을 목도한다. 실낱같은 사랑과 끔찍한 절망이 공존하는 사회의 모습을 백가흠은 담담하게 전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배꽃이 지고’에 사용된 경어체 문장은 장애인에 대한 착취와 폭력이 넘쳐나는 퇴락한 시골 마을의 괴담을 동화적으로 진술하며 어조와 내용의 대비를 통해 효과를 증대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 ‘배꽃이 지고’에 사용된 경어체 문장은 ‘인간극장’이나 ‘긴급출동 SOS 24’의 화면들에 하나하나 의미를 달고 이를 자세히 알려주는 아나운서의 내레이션(narration)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방송국의 카메라가 가난과 절망의 장면에서 사랑과 신뢰라는 가상의 해결책을 찾아내고, 이를 궁핍한 삶에서도 버려서는 안 될 방식으로 강조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상처를 봉합한다면, 이 작가는 현실의 갈라진 틈으로 카메라를 집어넣고 렌즈 앞에 펼쳐지는 실재의 압도적인 모습들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그는 반사회적인 내레이터이다. 이는 사회화의 욕망이 소거한 인물과 사물의 진실을 전달하려는 백가흠의 리얼리즘적 신념을 보여준다. 백가흠에게 사회화의 과정에서 탈각당한 인물 군상들의 모습과 처지는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는 실재이며, 이들의 심리와 상황은 무심하게 묘사하는 가시적인 방식을 통해 전달될 수 있을 뿐이다.



4. 가냘픈 연대와 미약한 사랑



편혜영과 백가흠은 현실을 전달해 주는 신문과 방송의 엄청난 정보 속에서 실재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포착한다. 2003년 3월 홍콩의 ‘아모이가든(淘大花園)’<주5: 몇몇 평론가들의 글과 소설 관련 기사에서 사스가 집단 발병한 홍콩의 아파트 단지를 편혜영의 소설 제목과 동일한 ‘아오이가든’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정확한 아파트 단지의 이름은 ‘아모이가든’이다. ‘홍콩, 아모이가든 주민에 격리령’, 연합뉴스, 2003. 3. 31.>에서 집단 발병한 사스(SARS)와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홍콩정부가 주민을 격리 조치한 사건은 부르주아 문명이 악취를 풍기는 거대한 쓰레기더미에 불과함을 알려준 ‘아오이가든’의 소재가 되었으며, 동물원을 탈출한 코끼리와 야생 동물들의 단신은 ‘퍼레이드’와 ‘동물원의 탄생’의 모티브가 되었다. 백가흠의 소설 역시 ‘긴급출동 SOS 24’에 빈번하게 소개되는 장애인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폭력의 참상, 쓰레기가 가득한 집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그가 다루는 주된 인물들은 신문의 단신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회적 최하층민들이다. 신문과 방송은 이들을 보도하고 사회의 현실로 제시하는 과정을 통해 이들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봉합한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편혜영과 백가흠에게 실재의 모습은 비록 “순간적이고, 흐릿하고, 불분명했으며 비현실적인 형체를 띠고 있”지만, 이들은 ‘괴물’처럼 현실의 단단한 시스템에 충격을 주고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현실의 틈새가 벌어지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각을 집중시켜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사회적 피억압자들의 고통을, 질병에 가까운 빈곤을, 그들의 육체에서 풍기는 죽음의 체취를 포착한다. 이들의 소설에 전면화된 실재의 처연한 풍경은 쉽게 스쳐지나가던 낯익은 광경을 기괴하며 끔찍한 것으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변모를 통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공간은 문명의 풍요가 아닌 폐허로 인식된다.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의 악취를 풍기는 도시(‘아오이가든’), 고대의 왕과 반역자, “전쟁 때 떼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유골이 뒤섞인 거대한 고분(古墳) 위에 건설된 지방 소도시(‘밤의 공사’), 능도(陵島)라 불리는 무덤의 형상을 한 섬(‘귀뚜라미가 온다’), 철거를 기다리는 퇴락한 연립주택(‘매일 기다려’) 등은 현실의 공간이 부르주아 문명의 처참한 잔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편혜영은 기괴함을 뛰어넘는 ‘초과’의 묘사를 통해, 백가흠은 사회적 봉합에 저항하며 현실을 폐덕과 폐허의 중첩으로 재현하는 ‘초과’의 서사를 통해, 실재를 전면화한다. 이러한 실재의 재현을 통해 독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처참한 광경이 예외적인 “비상사태(ausnahmezustand)”가 아니라 삶의 상례(常例)임을 깨닫는다.

‘비상사태’를 통한 역사의 인식은 잘 알려진 것처럼 발터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주6: 발터 벤야민, 반성완 역, ‘역사철학테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343~356쪽.>에서 주장한 바이다. 벤야민은 폴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를 ‘역사의 천사’로 설명하며, 천사가 도래하는 메시아적 시간을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현재시간(Jetztzeit)”에 의해 충만한 시간으로 상정한다. 벤야민이 인식한 지금까지의 역사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쌓이게 하는 단 하나의 파국이었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보라고 위장된 유럽의 보편주의적 역사관과 속류 마르크시즘적 역사관에 의해 천사의 도래는 절망적으로 보인다. 그가 말한 천사의 도래는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이며 이는 “마르크스가 혁명으로 파악한 변증법적 도약”이다. 이를 위해 역사가는 승리자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미래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고통과 억압받은 자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과거를 바라봐야 한다.

발터 벤야민이 “획 스쳐 지나가 버린다”고 말했던 과거의 진정한 상(像)은 편혜영과 백가흠이 포착한 실재와 그리 다르지 않다. 언제나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술되는 역사와 달리 비루한 인간들의 실패담에 주목하는 것이 소설의 본령임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과거의 진정한 상은 편혜영과 백가흠이 포착한 실재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편혜영과 백가흠이 빠르게 스쳐가는 현실의 이미지들 속에서 진정한 과거의 상(실재)을 포착하고 이를 소설로 재현했다고 해서, 쉽게 사회적으로 격리된 비참한 인간들이 하나의 주체화를 이루고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제 타인에 대한 적의를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며 죽은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했고(‘조대리의 트렁크’), 쓸쓸하게 죽어간 시체를 안장할 무덤을 파기 시작했으며(‘그런, 근원’), 폐허가 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랑의 낌새를 미약하게 느낄 뿐이다(‘첫 번째 기념일’). 이제 비참한 인간들의 가냘픈 연대가, 미약한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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