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다정한 말, 이상한 나라의 존재방식 - 김행숙 시 다시읽기'
성 명 : 기혁

1. 놀이하는 사람

신촌에 가면, 테이블 사이로 춤을 출 수 있는 ‘놀이하는 사람’이라는 술집이 있습니다. 손님들이 언제부터 춤을 추었는지, 처음부터 그러한 의도로 장소를 꾸몄는지 등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거리낌 없이 몸을 흔들고 낯선 이들과 술잔을 부딪칠 수 있는 ‘분위기’가 조명이나 음악의 선곡이 아닌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사람들’과 ‘춤을 춘다’는 것은 언어적 소통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갈라진 타인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춤을 추는 동안 놓게 되는 ‘가상의 다리’가 소통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부질없는 짓’으로 비쳐지지만 그러한 ‘부질없음’으로 인해 ‘행위 자체’에서 ‘생기’를 얻는 ‘놀이’의 성격을 견지한다고 보았습니다. “발이 미운 남자들”의 “무용”이 “전체적으로 아름다”워 보이고 “나의 자랑”될 수 있는 것 역시 이러한 행위 자체의 ‘아름다움’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

그런데 행위 자체에서 ‘생기’를 얻게 되는 놀이라면 행위의 내용과 더불어 ‘사람들’의 역할이 놀이를 성립시키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행숙에게 있어 사람과 사람이 모여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의 “부족한 믿음”을 보충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 보입니다.(“우리가 당신을 따라다니는 한 당신은 영원한 무대. 믿음은 부족하겠지만”, ‘코러스’) 사람들은 저마다의 얼굴 뒤편, 분주한 ‘백스테이지’에서 대사와 동작을 맞춰가며 ‘룰’을 만들고 그것으로 “부족한 믿음”을 대신할지도 모릅니다. 금요일 저녁, 우리가 동참하려는 김행숙의 놀이는 그러한 ‘룰’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다정함의 세계’ 부분)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타인과 밀착된 공간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응시하고 그와 동시에 응시의 대상이 되어 마주섭니다.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사람들’ 사이의 여러 감정들은 춤사위와 함께 약간의 제스처를 통해 표출될 뿐 직접적인 대화를 동반하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우리는 준비하고 있던 최소한의 대답만을 하거나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감정의 은폐’는 이 놀이의 기본적인 룰이자 사람들을 테이블에서 일어나게 하는 동인이 아닐까 합니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테이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타인이 부재하는 상황이 아니라 타인들로 충만한 상황에서 비롯되니까요.

연극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개인이 타인을 대할 때 표정과 몸짓 등을 조정하게 되고 표현은 의례적으로 다듬어 거리감을 유지하는 한편, 그러한 신비화를 전략적 기지로 조장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자아의 ‘인상관리’는 인간 자아의 본질을 교환가치로 취급함으로써 도덕적 행위와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구별이 사라지게 만들고 말았지요. 그리고 주변의 상황을 파악해 최종적으로 행동에 옮기게 되는 ‘나’를 모든 행동의 주인공석에 위치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2000년대 한국 시단에 두드러진 ‘전위’와 ‘실험’, ‘자아의 과잉’ 등은 교환가치로 전락한 인간 자아의 본질을 그 이전의 영역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로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의 권위를 걷어내고 속이 빈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젊은 시인들은 낭만적인 영역과 부조리한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다양한 형식과 언술을 도발했습니다. 이를테면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이국적인 인명과 지명, 현대연극 및 시나리오의 형식 등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결합을 통해 교환가치의 대상 자체를 교란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죠. 그러한 전략은 2000년대 초 우려되었던 자폐적 징후를 넘어 놀이의 성질을 띠는 것으로 진단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놀이를 위해 쓰는 가면과 자아의 인상관리가 어떻게 변별력을 지니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습니다. 애초에 이 놀이는 전략적으로 진행된 것이므로 하위징아가 언급했던 놀이, 즉 ‘무용성’과 ‘무관심성’을 근간으로 한 놀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비록 2000년대 초반에 시도된 놀이(실험)들이 부조리극의 주인공과 같이 해체된 세계의 ‘권태’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놀이에 의미가 부여되고 세밀한 해석을 시도하다 보면 그것은 전략적 차원으로 파악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위 ‘미래파’라 지칭된 젊은 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놀이를 일정한 형식을 갖춘 대상과 같이 체감되도록 유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미래파’ 이후의 세대들에게 그러한 체감이 자신의 시적세계를 구축함에 있어 놀이의 측면보다 전략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이수명의 표현을 빌리자면 특유의 ‘아웃사이더적인 성격’이 사라지고 ‘코드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타인의 응시를 모른 척하고 최소한의 의사표현만으로 진행되는 김행숙의 놀이에 동참해야 할 이유가 선뜻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놀이라면 일상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자아관리의 여러 형태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괜찮아요”, “고마워요” 말하며 함께 “희미해지”는 타인에 대하여, “양팔을 벌리”고 다가서는 “우리”에 대하여, 우호적인 느낌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김행숙의 시적 화자가 구사하는 일상어와 차분한 말투는 분명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수준의 따스함을 건네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건네받은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금요일 저녁, 음악에 몸을 흔드는 술집으로 찾아가 ‘다정함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놀이의 룰을 지키는 동안 ‘너’와 ‘나’는 “희미해지”고 ‘우리’가 되어 한없이 다가가지. 희미함은 사라짐이 아니라, 시의 행간에 숨어있는 비트에 몸을 맡긴 채, 끊임없이 운동 중임을 말하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행간 뒤 몸도 절정의 순간에 다다르지. 육체적 기쁨을 공유하는 놀이는 ‘너’과 ‘나’의 경계를 훼손하지 않고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던데. 놀이를 계속하는 한 부조리한 세계가 지닌 폭력성은 묵과되거나 반성을 강박하지 않지. 지연된다 말하지.


그림==남동윤 삽화가

2. 에코와 나르키소스

‘다정함의 세계’에서 처음 우리가 얻은 것은 “괜찮아요”,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로 희미해지는 ‘메아리’입니다. 다정한 어투는 감정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선택된 외형으로 조작된 자아의 것일 수도 본래의 모습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겠지요. 분명한 것은 가면을 쓴 채 부자연스럽고 제한된 방법으로 소통하는 사이 우리의 몸이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르는 순간을 하염없이 체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흰 돌 다음에 언제나 검은 돌을 놓고” 다시 “검은 돌 다음에 흰 돌”을 놓듯이(‘착한 개’) 서로서로 반응을 주고받으면서 말이죠.

일반적인 놀이가 가면을 바꿔 써가며 여러 인물을 드러내는 테스피스(thespis·최초의 배우)적인 전략을 구사한다면 김행숙의 놀이는 ‘인물’이 아닌 ‘육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가면은 고대 서사시의 여러 인물들을 선점하는 변화무쌍한 가면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화 이후 다정한 대답만을 건넬 수 있는 제한된 가면, 즉 ‘메아리’의 기능을 수행하는 가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되짚어보면 메아리와 육체의 관계에 대한 김행숙의 전략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에코’가 ‘주노’로부터 타인이 말한 뒤에는 말할 수 있으나 먼저 말 걸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된 이유는 대화의 마지막까지 말하고자 하는 그녀의 ‘나쁜 버릇’에 근거합니다. 아름다운 님프였던 ‘에코’에게 그러한 버릇은 육체적 가치보다 언어적 가치가 우선시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래서인지 ‘에코’는 자신이 사랑하는 ‘나르키소스’에게 말 걸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육체가 없는 존재처럼 행동하고 얼마 후 정말로 목소리만 남는 파국을 맞게 됩니다. 이러한 사태는 ‘주노’의 형벌이 ‘에코’의 육체적 파멸을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에코’ 스스로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위계에 길들어진 ‘에코’의 자의식은 소통 부재의 세계를 사는 현대인의 자의식과도 유사한 면이 있는데, 김행숙의 전략은 그러한 자의식의 ‘근거 없음’을 확인하고 그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행숙의 시적 화자는 ‘에코’의 육체를 되살리기 위해 가면을 쓴 ‘나르키소스’가 이미 ‘괜찮아요’, ‘고마워요’라고 말한 것으로 가정합니다. ‘에코’는 그러한 ‘나르키소스’의 말을 반복하며 사랑의 감정이 깃들 수 있는 자신의 육체, 즉 주노의 형벌이 미치지 않은 영역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을 되살리게 됩니다. 그 사이 가면을 쓴 ‘나르키소스’는 ‘에코’의 목소리로부터 느낀 다정함에 대해 반응합니다. 공포감에 휩싸이던 신화에서와 달리 ‘괜찮아요’, ‘고마워요’에 대한 우호적인 대답을 ‘에코’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에코’의 육체가 도래하는 순간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가면을 쓴 ‘나르키소스’는 라캉이 말한 거울 단계의 나르시시즘과는 다른 특성을 지닙니다. 라캉이 언급한 나르시시즘이 거울 속 완전한 자신과 거울 밖 불완전한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좌절(욕구의 충족이 거절된 상태)을 극복하는 요인으로 설명되었다면 가면을 쓴 ‘나르키소스’는 좌절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자학’이나 ‘자기 비하’와 같은 잘못된 ‘자기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이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고백’의 화법을 구사하는 시적 화자에게 지적될 수 있는 ‘감정의 과잉’을 다정함의 표현 속으로 포섭해 자폐적 성질을 소거하고 ‘느낌’을 통한 소통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소녀의 노래와 소년의 노래를 어떻게 구별하나요?/ 뗄 수 없는/ 눈빛과 입술처럼// 소년은 더 아름답고/ 소녀는 더 아름다워요/ 우리가 노래할 때/ 이 세계의 아기들은 어떻게 태어나나요?// 아기들은/ 가볍고/ 고통스러워요(‘하얀 해변’ 부분)



“소녀”와 “소년”의 노래가 구별되지 않는 메아리를 통해 김행숙은 “뗄 수 없는 눈빛과 입술”의 가치를 회복하고 나아가 “우리가 노래할 때”(놀이할 때) 그 육체로부터 “이 세계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전망합니다. 이것을 ‘놀이의 생산성’이라 부를 수 있다면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기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없다’고 말한 하위징아의 의견과 맥이 닿습니다. “가볍고 고통스러”운 “아기들”의 교환가치가 놀이의 바깥에 존재할 때 시의 전략으로서의 놀이는 ‘유희적 인간(Homo Ludens)’의 모습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김행숙의 놀이는 “아기들”을 목적으로 진행되지 않지만 우리의 ‘문명’이 발생할 때처럼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순간의 ‘우연’과 그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김행숙의 시적 화자가 ‘유희적 인간’의 모습에 근접해 있다면 우리는 ‘진정성’과 ‘시와 정치’의 문제 등 2000년대 중반 이후 지적되었던 여러 쟁점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향유될 수 있는 모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별의 능력’의 해설을 쓴 신형철은 ‘객환화(客幻化) 기법’이라는 용어를 동원해 시적 화자의 구체적 행동들이 “현실을 ‘재현’하겠다는 강박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환상적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강박’이 사라진 상태란 곧 시가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놀이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즉 가면을 쓴 ‘나르키소스’가 ‘에코’에게 이미 발화했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소년은 더 아름답고 소녀는 더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것은 비교의 구체적인 대상이 선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비교대상 자체를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앞서 말한 것처럼 가면을 쓴 ‘나르키소스’가 ‘에코’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 것으로 가정하는 이유는 ‘메아리’가 가진 위력을 드러내고 그로부터 현대 사회의 무기력을 폭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말을 건넬 법한 상황은 가면을 쓰든 그러하지 않든 애당초 ‘나르키소스’를 이끄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상황으로 다가옵니다. ‘나르키소스’가 ‘에코’에게 ‘다정한 말’을 건넬 만한 미래의 인과적 관계가 영원히 도래할 수 없는 사태 속에 내재해 있다면 현재의 모든 일은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먼저 김행숙의 전략이 배태된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투명인간

한때,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투명인간이었다. 선일여자고등학교 복도에서 뿌연 운동장을 내다보면서 이런 공상으로 뭔가를 견디곤 했다. 만약 내가 단 하루 만이라도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무조건 달리고 또 달릴 거야. 다만 멀어지기 위해. 내가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더 멀리에서 나타나고 싶었다.(‘사춘기’, 뒤표지 글 부분)



김행숙의 첫 시집 ‘사춘기’의 뒤표지 글은 “투명인간”을 환기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투명인간의 능력을 일시적인 상태와 지속적인 상태, 각각의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본다면 전자는 대체로 도덕적 판단이나 사회적 금기를 비롯해 여하한 마찰이 없는 상태로 세계와 접촉하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게 됩니다.

투명인간의 능력을 가진 도망자라면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더욱 안전한 곳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추적자의 눈앞까지 근접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죠. 반면 후자의 경우 투명인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이 입던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뒷골목을 전전할 것입니다.

드러나는 몸을 지닌 주체에게 타인의 응시를 받고자하는 욕망은 라캉이 언급한 나르시시즘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투명인간에게 그것은 응시와 거리두기를 동시에 충족시켜야만 하는 이중적인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김행숙은 “단 하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녀가 되고 싶었던 “투명인간”의 속성은 후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내가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더 멀리에서 나타나고 싶”은 것은 주체를 응시하고 있는 타인들을 따돌리고 싶은 욕망에 의한 발언입니다. 하지만 “선일여자고등학교 복도에서 뿌연 운동장을 내다보”고 있는 ‘나’는 자신의 존재가 “뿌연 운동장”의 인파로부터 응시되기를 “공상”하고 “뭔가”를 견디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욕망은 ‘사춘기’의 ‘시인의 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얘들아, 뭐하니?/ 나는 두 눈을 바깥에 줘버렸단다./ 얘들아, 얘들아, 어딨니? 같이 놀자.(시인의 말, ‘사춘기’)



김행숙은 거울 속 완전한 주체에게 눈을 맞추고 동일시를 시도하는 대신 “두 눈”을 “바깥에 줘”버림으로써 라캉이 언급했던 ‘거울 단계’, 즉 ‘어머니’와 ‘나’를 구분하고 타인을 인식하는 단계를 뛰어넘습니다. 대신 아이들과의 놀이로 그러한 단계를 대체시켜 세계를 경험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러한 경험은 거울 속 완전한 주체를 여전히 타인으로 생각하게 하면서도 놀이를 같이 할 아이들(타인)과 자신을 구별해야 하는 사태를 발생시킵니다. ‘나’의 존재가 지연되는 사이 함께 놀 아이들과 ‘나’는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타인의 응시를 갈망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행위(놀이)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적 쾌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우스(Hans Robert Jauss)는 미적 쾌락을 이루는 계기가 대상의 존재를 괄호로 묶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미적 대상으로 만드는 입장을 취해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미적 태도는 관찰자와 대상의 거리 설정을 포함하고 거리의 설정은 동시에 하나의 의식을 ‘창조하는 행위’가 됩니다.

김행숙의 거리두기는 이러한 야우스의 견해와 유사합니다. 대상(작품)을 읽고 싶은 욕망이 응시를 하고자하는 욕망이라면, 작품 속 ‘주인공’을 만나고 싶은 욕망은 응시를 받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우리는 전자를 거쳐 후자의 상태에 이른 욕망을 억압함으로써(괄호로 묶음으로써) 대상을 멀리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한 거리두기를 통해 하나의 상상적 대상(세계)을 떠올리게 되고 다시금 상상된 대상에 대한 접근(응시)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야우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외의 것의 향락을 통한 자기 향락’인 셈이지요.

이쯤에서 우리는 ‘에코’에게 최초로 ‘다정한 말’을 건넨 ‘나르키소스의 가정’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샘물에 얼굴을 비춰보지 않은 ‘나르키소스’는 거울을 보지 않은 ‘나’와 마찬가지로 지연된 주체입니다. 지연된 상태의 ‘나르키소스’에게 세계는 주체와 타자로 구분된 곳이 아니라 놀이를 할 ‘아이들’과 ‘나’로 구분된 곳이죠. ‘에코’를 만난 ‘나르키소스’는 거리두기를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놀이를 염두에 둔 ‘상상적 대상’으로서의 ‘에코’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의 ‘다정한 말’을 건네줍니다. 이렇게. ‘괜찮아요, 고마워요.’

라캉의 ‘거울단계’를 거치지 않은 ‘나르키소스’는 이미 가면을 쓰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가면을 향한 ‘에코’의 대답은 가면 너머를 향해 흘러들어 가게 됩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가 말한 그대로 다정스러운 문장을 반복할 뿐이지만 ‘나르키소스’의 입장에서 그녀의 대답은 주체의 고유한 목소리로 비쳐지게 됩니다. 이렇게. ‘괜찮아요, 고마워요.’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배신하며 피는 피를 부르지 않고 나는 당신을 부르지 않는다. 나는 당신과 교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전기를 감정에 비유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사라지면서 비명 따위를 지르지 않는다.(‘에코’ 부분)



김행숙에게 ‘에코’는 단순히 타인의 육성을 반복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배신”할 수 있고 “피는 피를 부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주장하지 않”지만 “전기를 감정에 비유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당신”의 목소리로 주장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나’의 목소리는 “당신”을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교체”되기 위한 몸짓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사춘기’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소한 기록들은 일상의 재현을 통한 부조리의 확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의 목소리로 타인의 육성을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김행숙의 시를 읽는 동안 대면하게 되는 세계는 우리의 내부에 어떤 충격을 가하거나 진공의 상태로부터 의미를 도출해낼 것을 강요하지 않지요. 이 사소한 기록들은 애초부터 “사거리라 불리는 오거리”(‘사소한 기록’)를 통해 부조리한 세계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당신”은 서른이 되어도 여전히 유아적이고(‘삼십세’), 이유 없이 불량스러워지고 싶습니다.(‘新桃林’) 오전 5시의 거리가 놀랍게 보인다고 생각하거나(‘오전 5시를 보다’), 휴일을 과격하고, 우울하고, 아름답게(‘8요일’) 만들기도 할 테지요. “당신”은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지만(‘사소한 기록’) 감았던 눈을 뜨면 매일매일 어리둥절해집니다.(‘기억은 몰래 쌓인다’)

자신의 육성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근접하지 못했던 진실까지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목이 잘린 생선을 보고서 “리얼리즘과 그로테스크의 관계”를 떠올리거나 “진화론과 목의 관계”를 떠올리는 것(‘사소한 기록’)보다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들이 하루하루 신체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적인 차원의 부피”를 넘어선 “거대한 여자”(‘당신의 악몽 1’)를 더듬어 보고 물이 가득한 “튜브”와 같은 타인의 육체를 상상하게 됩니다. 진실은 “은빛 호수 가운데 나는 떠오른 여자다”(‘당신의 악몽 1’)라는 자의식만으로 발견되지 않지만, 그러한 시체를 튜브 삼아 기댈 수밖에 없는 세계의 ‘절박함’을 통해 도래하게 됩니다.



집중은 부분적인 마비를 동반한다 심장이 뛰는 속도에 비하면 으으으 내 동작은 슬로 모션이다. 어떤 것도/ 먼저 멈추지 않겠다 나는 지금 무엇에 대한 直前이다 아직(‘폭풍 속으로’ 부분)



‘다정함의 세계’의 뒤편에 도사리는 절박함은 “무엇에 대한 의식을 끄”지 못한 채 “슬로 모션”을 취하게 되는 자아를 강박합니다.(“나는 거의 도달한다 이젠 무엇에 대한 의식을 끄고 싶다 停電.”, ‘두 개의 전선’) 시인으로 하여금 “두 눈을 바깥에 줘버”리고 놀이에 몰두하도록 한 원인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직전(直前)”과 “정전(停電)”의 상태는 눈앞의 ‘검은 얼룩’을 보는 것처럼 정확한 응시가 어려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라캉의 입장에서라면 우리가 몸을 돌리거나 한발 물러나, 응시의 기능을 회복하고 대상의 결점을 보아야 한다는 처방을 내릴 테죠.

그럼에도 이러한 절박함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 역시 ‘검은 얼룩’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사춘기’의 뒤표지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내부에 응시와 거리두기를 동시에 충족시키고자 하는 ‘투명인간’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면, ‘검은 얼룩’은 결점이 드러나기 직전의 상태가 아니라 한발 물러날수록 결점이 희미해지는 ‘완성’으로의 진행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투와 모자, 마스크 등으로 몸을 가린 ‘나’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응시될 때 ‘나’는 ‘투명인간’ 이전의 누군가로 인식되지만, 반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텅 빈 내부’라는 결점이 폭로됩니다. ‘투명인간’의 입장에서 “나는 거의 도달한다 (……) 停電”은 “정전(停電)”의 시간이 도래함에 따라 결점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대상에 자유롭게 도달하고(근접하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룩에서 멀어지도록 “먼저 멈추지 않”고 몸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텅 빈 내부’를 의식하지 않고서도 “직전(直前)”의 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자아를 압박하는 세계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김행숙의 전략은 지연된 주체를 통해 실현된다는 점에서 불안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한 언젠가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아야만 하고, ‘나’와 타인을 구분해야 하는 사건과 맞닥뜨려야 합니다. 그러한 ‘성숙’의 시간에 진입하게 된다면 ‘텅 빈 내부’가 폭로된 ‘투명인간’ 역시 주체를 숨기기 위해 감쌌던 겉옷들을 모두 벗어던져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품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행위가 정말로 ‘이별’일까요? 겉옷을 모두 벗고 ‘투명인간’으로서 세상에 첫발을 디디는 것이 ‘사라짐’일까요?

이제 다시, 금요일 저녁의 술집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춘기’의 소녀와 소년들이라면 “뒷문으로 나가볼래? 나랑 함께 없어져볼래? 음악처럼”(‘미완성 교향악’)이라고 외치게 되는 그런 곳 말이죠.


그림==남동윤 삽화가

4. 이상한 나라

음악의 ‘BPM’(Beats Per Minute, 분당 박자수)에 따라 심장박동수가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은 곡을 배치하는 DJ의 영향이 크겠지만 무엇보다 그 음악에 반응하는 개개인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타인과 보조를 맞추려고 하는가에 따라 진폭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수 싸이의 노래가 들려오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눈을 의식해 ‘말춤’을 따라 추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는 무관하게 각자 몸을 흔들며 해방감을 맛보곤 합니다. 타인에 대한 의식은 분명 말춤의 속도를 따라 가도록 우리를 강박하지만 그로부터 말춤 이후의 육체적인 흥분과 자유로운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잠재된 동력을 일깨우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음악의 레퍼토리를 거치면서 타인에 대한 자의식을 투명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분위기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합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드러나는 세계는 놀이에 동참한 누구라도 이름을 붙이고 호응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단순화되어 체감됩니다.(“우리는 아픔 없이 잘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섞일 수 있습니다. 만두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초대장’)

첫 번째 시집 ‘사춘기’가 ‘전야제’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은 ‘초대장’에 명시된 실질적인 스테이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파티에는 ‘고양이군’과 ‘착한 개’와 ‘한 사람’과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까지도 초대되어 가장무도회를 벌이게 되지요. “음식이 있고 음악이 아닌 것이 있고 더 많은 게 찾지 않아도 있”는(‘놀이의 발견’) 스테이지에서 우리는 수많은 ‘얼굴’의 이미지들과 ‘사라짐’의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희미해”진다는 것 그리고 “투명해”진다는 것은(‘다정함의 세계’) 놀이를 진행하는 김행숙에게 있어 단절의 순간이 아닌 연속의 차원으로 파악되는 것 같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저마다의 ‘몸’뿐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소통(신)이 부재한 세계에서의 이별이란 결국 끊임없는 몸의 부딪힘을 통한 긍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거울 속 ‘나’를 구분하기 위해 동원되는 ‘타인’의 육체 역시 ‘나’가 주체를 인식한 뒤에도 변함없이 거기에 머무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연된 ‘나르키소스’나 정체를 숨긴 ‘투명인간’이 주체를 확인한다 하더라도 타인과 더불어 놀이를 지속할 가능성은 열려 있는 셈이지요. 작품 전반에 걸쳐 ‘얼굴’과 ‘손’ ‘발’ ‘목’ 등 몸의 이미지가 눈에 띄게 분절되어 나타나는 이유 역시 육체의 해체를 의도하는 것이라기보다 주체의 인식과 분리되어 놓여 있는 ‘몸’ 그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투시불가능한 피부에 대하여/ 너는 어떤 가능성으로 도달하는가/ 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너는 무슨 표현을 하는가/ 얼굴을 벗어나는 얼굴은 유령처럼/ 없는 듯하고/ 무해하고/ 놀라운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너의 놀람을 표시했을 때/ 너를 놀리며 달아나는 꼬마들도 없을 때/ 너는 조용해지고/ 세계는 단순한 윤곽을 드러낸다(‘검은 해변’ 부분)



다만 이러한 놀이에 동참하기 위해 주체는 “세계“의 “단순한 윤곽”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계의 이름을 “만두”나 “거대한 고양이”(‘고양이 군의 25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상을 인식하게 되고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의 “단순한 윤곽”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음악의 ‘BPM’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타인과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혹시나 낯설어할 사람들을 위해 김행숙은 자신이 마련한 스테이지의 입구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붙여 놓았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지평선이 뜯어진 세계처럼/ 우리는 안녕.(‘이별의 능력’, 시인의 말)



“단순한 윤곽”으로 파악된 세계는 곧 “지평선이 뜯어진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우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상의 지평선’을 벗어난 세계입니다. ‘예상의 지평선’이란 독자가 익히 알고 있는 규범과 그 장르의 내재적 시학(詩學)에 의해 작품(세계)에 접근하거나, 문학사적 상황을 내포하는 작품들과의 함축적인 관계를 통해 접근될 때, 그리고 숙독의 과정 중 비교 가능한 허구와 현실 사이 또는 언어의 시적 기능과 일상적 기능 사이의 대립을 통해 구축됩니다.

김행숙에게 “지평선이 뜯어진 세계”는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하지 않은 나라로”(‘닭고기 파티’) 이동하는 과정 중에 불현듯 감각되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상한 나라”는 부조리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일 수 있지만,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논리적이고 조리 있는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앨리스’의 모험담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세계는 얼마나 적응하고 동화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뿐 정말로 조리·부조리의 영역을 나누어 변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행숙이 구축해 온 “이상한 나라”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연습하거나(‘고양이군의 수업시대’), 개처럼 네 개의 발을 들고(‘착한 개’) 공중에 떠오르거나, 시체가 되어 다른 온도에 속하게 될 때(‘시체가 되다’) 비로소 얼굴이 바뀐 사람(‘모르는 사람’)이 된 우리에게 “이상하지 않은 나라”로 인식됩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이별의 능력’이란 타인과의 놀이를 통해 세상의 “단순한 윤곽”을 읽고 향유하는 능력이며, 그렇게 단순화된 이름(시니피앙)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역으로, 새로운 의미(시니피에)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포괄하게 됩니다.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이별의 능력’ 부분)



‘사춘기’ 시절부터 “사거리라 불리는 오거리”(‘사소한 기록’)의 부조리함을 목격하고 세계의 ‘절박함’을 느끼며 살아온 ‘나’에게 매순간 “기체의 형상”이 되어 “이별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은 사실상 타인과 보조를 맞추려는 노력, 즉 우리가 매순간 개발하고 있는 ‘인상관리’의 능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매순간 갱신되는 인상관리의 목적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둠으로써 김행숙은 부조리한 사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영역을 반전시킵니다.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 순간의 미소가 ‘나’의 평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타인을 위한 것이 될 때 부조리한 세계는 새롭게 인식되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헛것들”을 보고,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하는 일련의 행위는 분명 부조리한 것입니다만, 작품 너머 존재하는 우리에게 그러한 부조리한 행위들이 다정함의 차원에서 인식될 때 현실은 그와 반대로 ‘한사코 조리 있는 사건’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작품 속 ‘나’가 “수증기”처럼, “담배연기”처럼 비정형(非定型)의 가면을 쓰고 존재를 지워가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사랑”의 형식이 되고 작품 밖 ‘우리’는 비로소 생동하는 대상으로 감각될 수 있습니다.



구부렸다, 폈다, 구부리는 운동 속에서 나는 계속되지 않는다. 나는 불연속적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들을 떠난다.(‘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부분)



‘이별의 능력’의 마지막에 배치된 작품을 통해 우리는 김행숙이 구축한 ‘다정한 세계’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구부렸다, 폈다, 구부리”는 육체의 “운동”을 시작할 때 “나”는 타인과 보조를 맞추듯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운동을 지속하는 동안 “나”는 “계속되지 않”고 우호적으로 변하죠.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 속”으로 “사람들을 떠나”게 되는 이상한 “불연속”을 경험하게 된답니다.



미디어가 죽음 충동을 증식시킬 수 있다는 불안, 스마트폰의 터치가 일상화된 세계에서의 몸의 인식, 소통 가능성을 실험할수록 ‘괴물’의 형상으로 다가오는 타자의 공포 등은 현실을 비틀고 고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많은 문학적 실험들에 타당성을 부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총기난사사건’과 같은 실제 사건을 마주할 때, 예상되는 감각의 영역이 상이하다는 점 역시 일깨워주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속되지 않”습니다. 문학적 ‘질문’마저 권태로워지는 어느 날 무언가를 선청(先聽)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따뜻하고 ‘다정한 말’ 그 자체일 것입니다.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에 이르러 김행숙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목의 위치’). 그러나 이 말은 독자를 향한 질문이 아닙니다. 시적 화자의 말을 되뇌는 동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돌려보내는 ‘메아리’의 첫 시작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닐까요? 금요일 저녁, 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동네 신촌(新村)으로 갑시다. ‘네가 손을 내밀자 시작되는 춤’(‘공진화co-evolution하는 연인들’)을 밤새도록 신나게 추도록 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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