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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
16 |
작성자 : |
울면서 달리기 |
2005-05-07 |
조회 : |
9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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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위인전기를 읽을 때면 늘 떠오르는 의문사항이 있었다. 왜 우리나라엔 위인들이 대부분 남자들인 걸까? 가뭄에 콩 나듯 하나둘씩 구색 맞추기 형식으로 들어있는 여자 위인들은 현모양처의 표본인 신사임당이나 애국자 유관순이 고작이었다.
역사책을 보더라도 황진이나 매창과 같은 기녀 출신의 시인이나 이름을 비출 뿐, 대부분은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아내, 누구의 처가 전부였다. 아니라면 남자를 홀리는 요부의 이미지가 고작이랄까.
그리고 새로이 발견한 이름 미실. 고급스런 붉은 문양에 흐느끼듯 흘러내리는 미실이라는 두 글자, 그리고 나비와 꽃 문양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표지는 그 외양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토지> 이후로 이렇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혈연 및 혼인 관계표는 과연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미칠 듯한 궁금증을 가져왔다. 그렇게 나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의 봄날, 그녀 미실을 만났다.
자유로웠던 유년 시절,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고 자신의 위치를 알았기에 그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였던 그녀 미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미실이 약해보이나 강하고, 영악해 보이나 순진하며, 요부의 몸짓을 취하나 순정녀의 눈빛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만큼 미실은 복잡미묘한 인물이었다.
사랑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을 깨닫기도 전에 사람을 매혹시키고 유혹하는 기술을 먼저 알아버린 그녀, 행복한 가정을 꿈꿀 자유조차 박탈당한 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 그녀. 바로 그녀가 날 매혹시킨 여자, 미실이었다.
풋사랑보다 더 풋풋했던 세종과의 첫만남은 그녀에게 여자로서 사랑받는다는 기분만 주었을 뿐이었다. 결국 권력의 힘에 의해 내쳐진 그녀의 진정한 삶은 봄바람처럼 슬며시 다가왔다 금세 사라져버린 사다함과의 짧은 시간 뿐이었다. 그마저도 사다함이 전쟁터로 나간 사이, 다시금 그녀를 그리워하는 세종에게로 돌려보내져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사랑을 잃으면서도 입술 한 번 꾹 깨물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누구보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먼저 깨닫게 되어버렸다. 남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사랑했으며, 남을 보호하기 전에 자신을 보호하게 되었다. 그렇게 미실은 소녀에서 여자가 되었고, 순수함을 버린 채 화려한 궁궐 세계 속으로 얼굴을 감추어 버렸다.
하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미실의 역동적인 생명력과 살아 움직이는 야생을 느꼈다. 앵두 하나도 직접 깨물어보며 사물의 감촉을 익혔듯,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를 알면서도 때로는 무모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상대를 가까이했던 그녀. 그리고 그만큼 그녀는 많은 생채기를 다른 이에게 주었고, 자신의 가슴 속에도 새겨 넣었다.
하지만 대원신통이라는 위치는 미실이라는 여자 자체를 규명해 주는, 그래서 그녀의 자존심과 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었다. 그 위치 때문에 그녀는 사랑했던 사다함의 곁을 떠나야 했고, 세 번이나 세종과의 인연을 맺고 끊어야 했으며,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네 명의 왕과 왕자를 모셔야 했다. 과연 그것이 그녀의 의지로서만 이루어진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중국의 측천무후나 조선의 장녹수, 장희빈과는 달랐다. 그녀가 정말 권력 자체에만 이끌려 자신의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면 자신이 낳았던 수많은 아들들 중 하나를 신라의 왕위에 앉히려는 계책을 꾸몄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남편을 나누어가진 사도왕후에게 살 길을 알려주었고, 그녀의 남편을 모셨으며, 외로워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남편인 세종마저 나누어주었다.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위해 부나비처럼 권력이라는 불 속으로 뛰어들던 수많은 역사 속의 여인들과는 그 궤를 달리 하는 행동이었다.
권력을 위해 사랑까지 이용했던 클레오파트라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처녀 여왕임을, 대내적으로는 유부남이었던 부하까지 유혹했던 엘리자베스 2세와도 달랐다. 그녀는 다만 신라의 여인. 미실일 뿐이었다.
물론 미실이 사도왕후와 결속 관계를 맺고 사도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동륜을 유혹하여 그의 아이를 낳은 점이나, 진흥왕이 죽은 뒤 금륜을 불러들여 자신을 왕후로 맞이할 것을 종용한 부분에서는 그녀의 권력에 대한 애착을 포착할 수도 있겠다. 신라의 근간인 화랑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위치를 다지려고 했던 모습에서도 그녀의 권력욕을 느낄 수 있겠다.
하지만 진정 그녀가 원한 것은 자신이 왕후가 되어 권세를 누리는 것도, 자신의 정적들을 처단하는 것도 아닌 자신과 아이들의 안위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이루어지지 않는 왕후의 자리에 대한 안달도 내지 않은 것이리라.
오히려 권력 지향적인 지소태후에 대항하여 자신의 가문과 가족들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런 연대적인 느낌과 가족에 대한 애착을 가진 미실이었기에 나는 그녀에게서 부드러운 여성성과 따뜻한 모성을 느꼈다. 남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추잡한 암투를 벌이는 궁중야사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사도왕후를 돕고, 외할머니인 옥진을 존경하며, 어미인 묘도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그녀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찌 보면 그녀야말로 시대를 앞선 여성주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늘 가부장적이고 여성에게 전적으로 불리했던 역사만을 역사로 인식해서였을까? 아이의 어미는 있되 아비는 없다는 지소태후의 자식들이나, 미실의 수많은 아이들을 보면서 약간은 불편함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내 몸에 뿌리박힌 유교적 인식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아무 거리낌없이 본능에 충실하고, 감정에 의지하는 신라 시대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자유가 부러웠다. 물론 그 역시 귀족이라는 특권 계급이었기에 가능했을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왕실에서조차 묵인되고 인정되었던 지소태후와 세종의 아비인 이사부의 사랑, 숙명공주와 이화랑의 사랑, 미실의 어미인 묘도와 아비인 미진부의 사랑은 윤리라는 명칭으로는 판단되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고 사랑의 형태였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가능했던 그 시절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부자와 형제를 동시에 모셨고, 친동생인 미생과도 관계했으며,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사다함의 이복동생인 설원랑까지 유혹했던 그녀 미실. 과연 그녀는 윤리적 제약이 미약했던 신라 시대 왕실이 낳은 요부였을까? 아니면 당대의 자유로운 여성의 전형이었을까?
그녀가 지닌 용기와 자유로움, 야성, 부드러움, 대담함, 그리고 그녀가 수많은 남자들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그녀만의 매력. 여성이 지닐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의 결합이자 결정체인 여인 미실. 한 권의 책으로 풀어내기엔 너무 촉박했지만 작가 김별아는 위험 요소나 유혹 요소를 잘 피해가며 미실을 하나의 여성으로 완성시켰다.
남성 작가들이 만약 미실을 썼다면 그녀의 복잡한 남자관계와 수많은 성애 장면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겠지만, 작가 김별아는 미실의 심리 세계와 복잡미묘한 심리 변화에 초점을 기울였다. 그랬기에 미실이 생동하는 하나의 인물로 작품 속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부드러운 장면 묘사와 섬세한 문장들, 하나하나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풍경 묘사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실, 그녀를 2005년 현재로 불러들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어찌 보면 현대 여성이 가장 닮고 싶은 여성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미실이 사랑스럽다. 그녀의 순수함이, 넘치는 사랑이,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부럽다. 아마 당분간은 그녀, 미실을 내 손에서 놓지 못할 것 같다는 행복한 예감이 든다.
내게 미실은 다만 신라 시대의 여인, 미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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