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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
32 |
작성자 : |
소백산맥 |
2005-05-30 |
조회 : |
9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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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글 속에 숨어 있는 인물들을 만나는 것은 즐겁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날 지 상상하는 것 또한 흥미롭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을 찾아내어 사색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터져 오르는 열정과 새로운 맛을 내는 솜씨를 가진 이를 만났을 때 그 인물은 진정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화랑세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 미실. 그녀는 그녀를 바로 보려고 애쓴 작가의 손을 따라 내 앞에 왔다.
신라 시대의 화려함과 함께 신라인들이 누렸던 자유로움은 우리를 자주 놀라게 한다.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당당함과 유려함은 또 다른 놀람을 가져 온다. 색공지신. 대원신통의 혈맥. 의지에 앞서 의무에 충실해야 했던 여인, 미실. 그녀의 사랑과 결합과 떠남을 애써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얽히고 설킨 관계를 살펴볼수록 미실의 생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을 한 번에 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미실의 생이 끝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은 저 밑에 숨겨져 있던 삶의 근원적인 목적을 다시 끄집어 내어 생각하게 한다.
사랑 이전에 의무가 있었다. 그 의무는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운명적으로 주어진 의무와 처해 있는 환경은 미실이 하여야 할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미실의 마음에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사랑이 있었다. 야망이 있었다. 두 발로 자신 있게 서고자 하는 인간이었기에. 왕과 왕자들과 화랑들과 귀족들과의 사랑이 전부는 아니었다. 한 인격체로서 자신을 찾아 돌보고 싶은 욕망이 끊임없이 솟아났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힘의 위대함을 느끼고 싶은 야망이 솟구쳤다. 그 원초적인 욕망을, 원대한 야망을 이루기 위한 애씀이 있었다. 때로는 말없는 정숙을 필요로 하였고 때로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술수를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에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이 가지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하더라도 미실의 삶 한 가운데 뚜렷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실은 그 사랑을 통해 의무감을 뛰어 넘어 자유로운 하늘을 날고 싶었다.
신하의 위치에서 하늘을 섬기면서, 뭇 남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리고 한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권력의 주변의 어려움과 권력 중심부의 힘을 모두 경험하는 미실. 그녀의 성장과 사랑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과 무서울 만큼 치밀하면서도 처절하게 권력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가는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 주는 것은 무엇인가? 미실을 미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인격체로서 인정 받지 못하는 하나의 도구로써 마쳐질 수도 있던 생을 최대한 자신의 것으로 만든 미실의 당당한 모습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염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아름다움 그 자체,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에 족한 절대의 가치.”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높고 날카로운 삶의 비명과 같다고 하였다. 미실의 삶을 이 보다 더 정확히 그러나 슬프게 나타내는 말이 어디 있을까? 높고 날카로운 삶의 비명. 그 속에 숨은 안타까움이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한 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세를 냉철하게 돌아보라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파고 든다.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듯이 잔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그려지는 작가의 세밀한 묘사는 바람 한 점에 흩날리는 나뭇잎까지도 눈 앞에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애타는 감정을 글 뒤에 숨기면서도 새로운 완성체로 미실을 만들어 낸 작가의 혼에 고개를 숙인다. 봄이 가는 때에 봄에 떠난 미실을 만난 나날은 사고의 장을 넓히고 또 다른 눈을 가질 수 있게 된 나만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미실이 보내온 생각의 시간에 새로움을 향한 발걸음의 영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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