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당선작이라는 타이틀에 무심코 집어든 책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했던 것은 붉은 표지 때문이었다. 검붉은 색과 선홍색이 어우러진 붉은 바탕에 아로새겨진 꽃송이가 조금은 허망하게 느껴지는 표지의 강렬함에 책장을 넘겼다.
왕을 비롯한 왕족에게 색공을 하여야만 하는 대원신통으로 태어난 미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어릴 때부터 이미 슬픈 운명을 뛰어넘어 있었다. 여인의 미색뿐만 아니라 화랑으로 다져진 남자들의 수려함마저 칭송하였던 아름다움을 사랑한 신라. 그 아름다움의 정점에 미실이 서 있었다.
어린 시절을 숲속에서 자유로이 뛰놀며 자란 야성미와 타고난 총명함으로 독서로 연마한 지성미는 곧 성애에 대한 풍부함으로 이어져 그 앞에서 신라 최고의 남자들이 하나 둘 스러져갔다. 지극히 순수하고 온순한 첫 정인 세종의 끊임없는 순애보... 궁에서 내쳐진 후 벼랑 끝에서 만난 사다함과의 짧고도 애틋한 사랑... 대원신통의 보존을 위하여 유혹한 동륜태자와의 성애... 마침내는 황제 진흥제의 절대적인 총애까지... 미실은 점점 높을 곳을 향해 올라갔다.
자신의 성을 무기로 하여 남자들을 정복해 나가고 왕가의 기류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한발 앞서 대처하면서 미실은 왕실 최고 권력의 자리를 오롯이 지켜나갔다. 미실에게 있어 유혹은 왕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단이요, 여성으로서의 본능이며, 대원신통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정당방위였다. 예스럽고 우아한 단어로 농밀하게 그려지는 교합의 표현은 아찔하면서도 단순한 쾌락의 정사를 넘어서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랑이 어찌 아니 행복할 것인가. 그러나 미실의 남자는 왕가의 남자였다. 하루 아침에 정세의 패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 막다른 구석으로 몰릴 수 있는 왕실에서의 유혹의 이면에는 불안함이 느껴졌고, 자신의 가슴에서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남자들의 외침을 들으며 조용히 미소짓는 미실의 얼굴 너머로 공허한 슬픔이 전해졌다.
끊임없이 아름다워지고 유혹할 것이며 사랑받으리라. 나는 누구도 아닌 미실인 것이다. 그녀를 지켰던 것은 그 어떤 남자도 아닌 스스로를 사랑했던 자신이었다.
왕족의 여자란 숙명의 배에 주저없이 올라타 스스로를 믿으며 낭떠러지일지도 모르는 그 끝을 향하여 질주하는 미실의 뒤를 따라간다. 세상의 조용한 봄에 살포시 닿은 여정의 끝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천오백년 전 신라가 유혹당했던 여인 미실에게 나 역시 깊이 매료당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