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직설적이면서 생생한 문체들은 마치 미실이 바로 내 옆에서 뜨거운 숨결을 내뱉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이미 미실은 책속의 여인이 아니라 살아나서 나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 주고 있었다.
미실의 열기를 상징하듯한 붉은 책장을 열고 첫페이지를 읽어내리는 순간 그녀에게 사로잡혔던 사내들처럼 빠르게 그녀의 얘기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져보고 맛보고 머뭇대지 말고 깨물어 터트려 보라고 얘기했던 옥진을 말처럼 앵두나무 가지를 왁살스럽게 훑어 내려 한가득 입속에 물아 넣고 와삭 깨물던 어린 미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한 거침없는 그녀의 행동에 그녀의 손안에서 붉게 터지던 앵두처럼 나도 붉은 사랑을 그녀의 손에 터트리며 그녀의 행동에 말투에 그리고 운명이 너무나 궁금해져 빨리 따라가고 싶은데 밭을 가는 소마냥 느리기만한 내 눈의 읽어 내리는 속도를 원망했었다.
미실..원하든 원치않든 그녀의 어미와 그어미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이어 받아야만 했던 서글프게 아름다운 여인. 그녀의 어린시절의 총명함과 아름다움은 앞으로 있을 그녀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가 자유로운 그녀의 마음을, 시원하게 터트려내는 웃음을, 또박또박 뱉어내는 힘있는 말투를 보고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사랑에 어미인 지소태후의 뜻을 거슬러 영까지 빼앗겼던 세종의 무력하고 이기적인 사랑. 처음으로 미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고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숨기고 싶게 만들었던 운명에 아파하는 아름다운 미소년 사다함. 모두 그들의 얽히는 사랑에 나의 가슴이 미어지듯 했다.
특히 내가 가장 가슴 아파하며 분통을 터트렸던 장면이 있다. 훗날의 사랑을 기약하며 사다함이 전장으로 떠나던 날 가슴의 불을 삭히지 못해 기어이 미실을 궁으로 불러 들였던 세종에게 분도를 느꼈다. 이제 막 미실도 진정한 사랑을 느꼈는데 그녀를 흥분 시키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는데 그 행복을 깨뜨리는 세종의 사랑은 차라리 오직 자신만을 위한 탐욕스런 남자의 욕정으로만 보였다.
차가운 눈밭같은 모진 운명을 과감히 끊고서 훨훨 날 수는 없었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그녀는 운명에 저항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지금의 내 모습이 불쑥 불쑥 쳐들어와 미실과 뼈아프게 냉혹한 비교를 당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당연히 호주가 되고, 아들이 대접 받는 지금의 현실이 가끔은 못마땅 하게 느껴졌지만 결코 저항하거나 바꾸어 볼 생각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었다. 페미니스트를 가장한 말도 몇 번 던져 보기도 했었지만 결국 나는 길들여진 여자였을 뿐, 미실처럼 진취적인 사고를 하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여자의 힘을 생각해 보았다. 세상을 지탱하는 거대한 힘이 남자의 거친 근육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까지 갈대에만 비유되던 나약한 여자의 손 끝에서 비롯 될 수도 있겠다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