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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
42 |
작성자 : |
쪼깐이 |
2005-05-31 |
조회 : |
27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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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은 듯 풋풋한 앵두향으로 시작한 미실의 한바탕 질곡한 이야기는 미처 사람손이 닿지 않아 느지막하게까지 영글은듯한 지긋한 앵두밑에서 끝났다.
책의 도입부와 끝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한 이 앵두는 미실의 단심(丹心)이다. 평생을 두고 알알이 멍든, 색신이전에 여자로서 마음에 두었던 남자마저 제대로 품어보지 못했던 단심(丹心). 그 눈물, 그 한숨, 그 곡절..
색공지신의 집안에서 태어나 첫 정을 나눈 남자에게서도 방중술을 먼저 떠올린 미실은 과연 진정한 사랑을 알았을까. 영원하리라 믿었던 세종과의 사랑도 사이좋은 남매처럼 함께 먹고 함께 놀았지만, ‘자신의 운명에 새겨진 바를 다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꼈다’고 미실은 작가의 혼을 빌려 애통해했다. 평생을 마음에 담아두었고 그녀의 과거와 기억마저 죽였던 사다함과의 사랑은 다르리라 생각했지만 그 사랑도 채 맛보기도 전에 보냈다.
나는 미실을 만나면서 미실의 사랑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간혹 언급된 미실의 사랑의 농도는 너무나 미미했다. 오히려 그를 통해 맡은 남자들의 향이 더 짙었다. 미실의 몸을 통한 그들의 사랑은 때로는 물에 젖어드는 듯 질척했고, 때로는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달콤하다가도 이내 새끼를 빼앗긴 어미의 울음인 듯 처연해서 책을 덮은 후까지 내 속을 베어내며 괴롭혔다.
끝까지 미실의 마음을 얻어내지 못한 세종의 사랑은 마치 대나무 같았다. 미실을 처음 만났을 때 한마디가 자랐고, 어미의 수작으로 밀려날 때 한 뼘이 또 자랐다. 그렇게 자란 대나무는 곧으면서도 유해서 미실의 움직임에 따라 지조없이 흔들렸다.
미실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사다함 또한 그의 어미가 죄 중에 밴 생명이었다. 그 원죄를 미실과의 사랑으로 씻고자 했으나 오히려 무관랑까지 그 원죄에 끌어들이며 더 큰 고통을 안았다. 미실의 사랑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닐까.
무로 시작한 미실의 궁 생활은 사람을 겪으며, 사랑을 잃었다. 지소의 계략, 사도와의 음모, 미생과의 거사는 미실을 더 이상 풋앵두의 향을 지닐 수 없게했다. 나날이 늘어가는 재물과 더불어 높아지는 위상은 미실을 오히려 나락을 빠뜨렸다. 혀짜래기 곱사등이 사내에게 베푼 순간의 정, 그것으로 미실의 향은 끝이었다. 작가가 말했던 곱사등이를 통한 정화는 미실의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에 대한 정화였을 것이다. 그 후, 미실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한 시대를 날카롭게 후려쳤던 미실을 꺽었던 것은 결국 사람의 힘이 아닌 세월의 힘이었다. 희대의 요녀라고도 불렸던 미실은 그에 걸맞게 백발과 주름, 경험과 연륜으로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알았다. 비록 설원의 죽음을 통해 사랑하지 못한 자의 아픔을 힘들게 받아들였지만 그마저도 그의 가는 길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미실은 가장 미실답게, 초연한 모습으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놓아주었다.
주어진 삶을 강요받았던 미실은 그 억센 운명의 굴레를 남자들을 통해 스스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미실을 거친 남자들의 사랑이 그리도 힘겨웠고, 나 자신까지도 아직 미실의 손에 쥐어진 가락지처럼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나보다. 미실은.. 다시금 작가의 손을 빌어 운명을 시작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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