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통 회사를 다니는 덕분에 점심시간에 짜투리 시간이라도 나면 잠시 근처 대형서점을 산책(?)하는 제법 호사스런 취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산책인지라 정작 그 많은 책들의 숲 속에서 책의 향기를 맡으며 유유자적 걸어다니며 관심가는 책을 펼쳐보기만 할 뿐 서점을 나올때에 제 손에는 책 한 권 안 들려 있곤 하지요.
어쩌다 아내나 아이의 부탁으로 여성잡지나 아동도서를 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쩌다 시사잡지 정도를 살 뿐 그렇게 독서에 인색한 저이지만 얼마전 아주 강렬한 유혹과도 같은 책을 한 권 만났으니 바로 "미실" 입니다.
마치 여인의 농염한 붉은 입술과도 같은 붉은 색 표지의 미실... 그러나 책장을 몇 장 펼치자 정작 농익은 문체와 이야기는 표지의 색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우리의 역사속에 이런 엄청난 여인이 있었다니... 신사임당이며 논개며 유관순까지... 내가 역사책에서 만났던 여인들은 반듯하고 충절의 대쪽같은 정신이 뼈속까지 꽉 찬 그런 여인들이 주류였는데 우리 선조중에도 이런 독특한 안티히로인이 있었다니... 길지 않은 점심시간에 계속 서점에 서서 책장을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서둘러 그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지요.
그리고 퇴근하고 맥주 한 잔 하자는 회사 동료들의 말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부랴부랴 책을 읽기 위해 퇴근시간이 되자 저는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향했으니...
모처럼 일찍 퇴근했다고 좋아하는 아이 한 번 안아주고 이른 저녁을 먹고 본격적으로 미실 그녀와의 밀회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미실... 이 신비스런 여인의 역사적 근거는 바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였습니다.
대표적인 주입식 암기교육세대인 제가 학창시절 "김대문...화랑세기... 김대문...화랑세기.."식으로 무턱대고 암기하던 기억속에 그녀는 당연히 그 자리가 없었기에 저에게는 낯 선 여인일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이 미실이라는 책이 근거하는 화랑세기 필사본 자체가 아직 진위조차 결론이 내려지지않은 상황에서 신라시대의 자유분방했던 여인을 소설로 되살려낸 작가의 진심은 미실이라는 여인을 차입해서 오늘의 우리 시대 여성들의 성적 정체성, 더 나아가 여성들의 자아에 대한 진솔한 접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근거에 바탕한 그녀의 행적보다 그녀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가 더 크리라 생각됩니다.
색공(色供)이라는 즉, 性적인 서비스를 왕에게 바치는 신하라는 야릇한 직업을 가진 그녀... 어쩌면 그 시절에는 요즈막의 그 어떤 고위관직 이상으로 사회적 위상과 실력을 가졌을 그녀의 직업에 야릇하다는 느낌부터 갖는 제 자신이 시대의 좁은 벽에 갖힌 답답한 사람이겠지요.
문화와 사회 그리고 윤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모습이 얼마든지 달라지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가치인데 오늘의 척도로 그녀를 미리 제단하고 예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겠지요.
하기는 지금은 나이 지긋한 남자들 조차도 스스럼 없이 귀걸이를 하지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귀걸이를 한 남자는 사회의 불온한 아웃사이더로 취급될 정도였으니 윤리의식에 대한 어줍잖은 절대성의 추구는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잠시 말이 옆으로 흘렀는데, 책의 대강의 스토리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서 화려한 성적 테크닉을 배운 미실이 무명의 미녀가 우연히 압구정 어느 길거리에서 로드헌팅되어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듯 왕에게 발탁되어 궁에 발을 디디게되고 권력쟁투에 휘말려 궁에서 쫓겨났다가 와신상담 다시 화려하게 궁으로 컴백해서 권력다툼에서 이겨서 왕실의 실질적 권력을 차지한다는 어찌보면 어느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을 것 같은 이야기 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상상 가능한 스토리의 프레임이나 역사적 근거로만 미실을 본다면 미실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울 것 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정작 그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은 어쩌면 그저 그녀 곁을 스치고 지나는 강물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미실은 세종의 아내이면서도 화랑 사다함과 연인관계였고, 진흥왕과 그의 두 아들들인 동륜태자, 금륜태자에게까지 색공하였을뿐 아니라 손자 진평왕에게까지 3대에 걸쳐 색공하였다는 파란만장한 애정행각도 그녀의 삶에 대한 적나라할 정도의 솔직함과 투철할 만큼의 성실성을 이해하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보다는 미실이라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의지에 집중해서 책을 읽는다면 그녀가 가진 캐릭터에 흠뻑 빠져드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녀에게서는 성모 마리아같은 거룩한 모성애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같은 열정, 마리 앙뜨와네트와도 같은 욕망까지도 느껴지는 마치 다양한 색깔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신비로운 수정 모자이크같은 매력이 있었다면 지나친 과잉반응일까요?..
보는 각도에 따라 제각각 다른 오묘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는 수정의 이름다움이야말로 미실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비유일거라 생각합니다.
욕망 앞에 거추장스러운 가식을 늘여놓지않는 그녀의 모습은 바로 진실한 마음에서 기원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논리를 꿰뚫어 보고 그러한 권력의 추구와 활용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를 확득할 만큼 지혜로운 그녀...
바로 이런 미실의 모습이야말로 작가가 오늘을 사는 여자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알려주고 싶은 여성의 정체성의 방향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늘날의 여성들은 여권이 많이 신장되고 여성들의 자아실현이 과거에 비해 많이 향상되었다지만 어려서부터 수없이 많은 왜곡과 제약으로 욕망에 대한 의지 자체를 말살당하며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대부분의 많은 여성들에게 미실이 전해주는 메세지는 그 의미가 클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미실을 많은 여성들이 읽기를 바랍니다.
미실은 시대를 앞 서 살았던 요사스러우리만큼 요염했던 팜무파탈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인간으로서의 하나의 성을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주체성에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충실하게 부딫히며 좌절에도 굴하지않고 성취를 이루었던 진솔하고 성실하게 세상을 살고 간 여자였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