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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듬이 끝에 눈이 달린... 미묘한 생명체! 미실. |
| 번호 : |
47 |
작성자 : |
공중누각 |
2005-05-31 |
조회 : |
27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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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사온 상추에 달팽이 한 마리가 묻혀왔다.
아이는 만화에서 보던 캐릭터를 실제로 보게 되자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즉석에서 '핑핑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평소 즐겨보는 만화에서 따온 이름이다.
"엄마~ 이게 달팽이 눈이에요."
아이는 <긴 더듬이의 끝에 곤봉처럼 달려 있는 것을 눈>이라고 가리키며 설명 비슷한 것을 해주었다.
설마~ 더듬이 끝에 눈이 있을라고...
'7살 난 녀석이 무얼 알까' 싶어 인터넷을 찾아 봤더니 정말 더듬이 끝에 있는 것이 눈이었다. 40년 가까이를 살아오는 동안 내가 아는 생명체의 눈은, 언제나 머리 정면이나 측면에 붙어 있었는데 이렇게 더듬이 끝에 눈이 달린 생물도 있었다니...
빨간 표지에 쌓여 다가온 미실은 내게 달팽이와 같은 존재였다.
더듬이 끝에 눈이 달려있는...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묘한 생명체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목단 꽃처럼 농염한 모습으로 진흥왕, 진지왕(진흥왕의 아들), 진평왕(진흥왕의 손자)이라는 세 군주를 치마폭에 감싸안은 채,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한민족 최고의 팜므파탈(Femme fatale) 미실!
위의 세 왕을 색으로 섬기는 것도 모자라서 시대 최고의 권력가, 영웅들과도 복잡한 관계를 맺었고 자신의 친동생과도 혼음을 했던, 신라 최고의 색공지신 미실!
유교로 철저히 길들여진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탕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1500년을 거슬러 그 시대 관습과 관점으로 되돌아가 그녀를 바라본다면, 미실-그녀의 삶은 색공(色供)지신이라는 자신의 운명에 최선을 다한 모범적인 삶이었고, 그녀가 가졌던 아름다움과 권력도 신라 여성들의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적극성은, <유교와 금욕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 여성들에게 반감을 심어주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어떤 것이 여성 본연의 모습인지 양자(兩者)를 한번 비교해 볼 기회를 제공해주었고 더 나아가 앞으로 어떤 여성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할지를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주었다.
그 뿐 아니라 색공과 권력 숭배로 이어진 미실의 파란만장한 삶은, 신라 골품사회의 가려진 단면과 <세속오계, 삼강오륜> 등으로 대표되던 화랑의 감춰진 이면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 사뭇 흥미로웠다. 지배세력들이 근친혼을 통해 혈연으로 철저히 묶이고 이 탄탄한 혈연 관계에 의해 왕위계승, 골품, 화랑 등의 사회 상부구조가 이루어지는 모습이 우선 쇼킹했고, <신라시대 최고의 정신>으로 상징되던 화랑도가 미실이라는 여자의 치마폭에서 놀아나고 그녀의 권력 장악 도구로까지 쓰여졌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나치게 포장되어온 화랑도의 껍질이 한 겹 벗겨지면서, 그곳 역시도 사랑과 서열과 음모와 권력이 존재하는 보통 사람들의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책은, 색공지신인 미실이라는 여성의 삶을 통해 신라 시대의 성 모럴과 골품사회를 그대로 재현해 보였고,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성을 소재로 한 소설은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면 자칫 통속소설로 전략하기 쉽다.
<미실>이라는 책 역시도 그 빨간 표지만큼이나 위험한 소설이었다. 만약 작가의 충실한 고증이나 타고난 역량(문장력, 구성력 등등)이 없었다면 분명 그것은 독자들의 잠시잠깐 흥밋거리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별아 작가는, 마치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픽셀 아트>처럼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에까지 공을 들인 듯 했고, 그 덕택에 <미실>이라는 인물은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삼차원적 생명체로 복구됐으며, 그녀가 살았던 신라 역시도 미화나 숨김없이 그대로 복원되었다.
미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천 오백 년을 거슬러 신라 시대, 미실의 거처로 날아가 그녀 곁에서 부채질을 해주는 무수리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그녀의 거침없는 삶과 화려한 귀족 사회와 권력의 흐름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그녀의 관능적이고 거침없는 삶에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한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종이 위엔 고구려 고분벽화 같은 풍속도가 그려지고, 그 그림 속의 남녀는 사랑을 나누고 음모를 꾸미고 권좌에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가 그린 그림은 때때로 화려한 풍속화일 때도 있지만, 어떤 순간엔 뒷방에서 혼자 숨겨 놓고 보고 싶은 고급스런 춘화일 때도 있다. 하지만 화려한 풍속화를 볼 때도 고급스런 춘화를 보고 있을 때도 우리는 그 흡입력 강한 그림에서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다.
작가는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로 <미실이라는 인물과 시대>를 아주 생생히 잘 복구해 냈고, 우리는 그 미실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녀의 삶과 우리 삶을 비교해봄과 동시에 오늘 보다 더 나은 삶을 찾아 삶의 밑그림을 다시 그려보게 된다.
아무래도 조만간 가까운 박물관으로 미실을 만나러 가게 될 것 같다.
역사 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그 시대가 궁금해진 건 처음이다. 평소, 아이 때문에 박물관을 자주 찾는 편이지만 선천적으로 옛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타입인지라 그곳에 가도 유물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보는데 거칠 뿐, 정작 그 유물들이 갖는 의미나 조상의 숨결을 느껴보려고 노력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제는 그곳에 가면 미실- 그녀의 숨결을 한번 찾아보아야겠다.
시커멓게 변색된 신라의 유물 뒤에서 가슴을 살짝 드러낸 새 빨간 비단 옷을 걸치고 새초롬한 모습으로 후손들을 유혹하고 있을 미실, 그녀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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