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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
53 |
작성자 : |
은진 |
2005-05-31 |
조회 : |
25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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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깊은 줄을 남기는 책이 있으면 어김없이 그 날 밤, 꿈을 꾸었다.소설속의 어느 공간에서 나는 달리거나, 숨어 있거나, 누군가를 훔쳐보고 있었다.그런 꿈을 꾸다가 깨어난 한 밤중이면 안도의 한숨을 쉬곤 했었다. 그것이 그저 꿈일 뿐이라는 것에 말이다.
소설속의 어딘가로 걸어들어가던 꿈을 꾼 것이 참 오랫만이었다.어른이 되고 나서는 처음일런지도 모르겠다. 붉은 책의 소설을 머릿맡에 놓아두고 야금거리며 읽었던 몇 날.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멍한 머리로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들었던 밤. 그녀를 만났다.
미실은 그녀가 모셨던 어느 왕의 궁전 구석의 연못에 앉아 있었다. 수풀속에 가려진 사람의 손이 채 닿지 않은 작은 연못의 앞에서 치마를 펼치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쉴 곳이 그 넒은 궁전 속에 이렇게 작은 곳이었다니. 미실은 어린 짐승처럼 뛰어다니던 숲 속의 기억을 그 곳에서야
가끔 꺼내볼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미실 곁에 앉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훔쳐보다가 물었다.
당신의 사랑을 전쟁터로 떠나보내고, 다른 사람과 몸을 섞여야하는 것이 그저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냐고..
미실은 고개를 돌려 차갑고 깊은 눈으로 내게 말했다.
-내가 없었다면 그들의 삶에 무엇이 있었겠니.
누군가의 삶은 시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미실에 대한 몇 줄의 기록이 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미실의 삶을 생생하게 펼쳐놓았다.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다시 미실의 삶을 기억하게만든다. 책을 읽은 후 내게 미실의 모습은 시대를 앞질러갔던 한 여자의
모습으로 남았다. 두려워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길을 만들어 나갔던 여자.
미실은 태어날 때부터 왕을 색으로 받들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냤다. 그 것은 미실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택할 수 없음을 뜻하기도 했다. 미실은 옥진을 따라 그녀의 정해진 삶을 받아들인다. 미실이 사랑했던 첫 남자인 사다함을 전쟁터로 보내고 왕의 명에 따라 궁으로 들어와야 했던 그 순간부터 미실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의지의 어느 부분은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 후로부터 미실의 삶은 대원신통으로서의 길이었다. 색으로 모신 왕의 사랑을 얻고, 권력을 얻고, 몸에 탐닉하며 배신하기도 했었던 길고 긴 삶이었다. 숲속을 발가벗은 몸으로 누비며 짐승처럼 뛰어다녔던 어린아이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왕을 자신의 치마 속에서 녹였던 색공지신이었다가 미실 자신이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병이 들어 몸에서 진물을 내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없이 마음이 원하는대로 끝까지 걸어갔던 인간이 미실이었던 것이다.
미실은 매순간 자신에게 물었으리라 생각한다.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사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지 말이다. 미실이 권력을 쥐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요부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았던 여자였기에 이렇게 누군가는 그녀의 삶을 문자로 그려내고, 또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문자를 넘어선 환영을 더듬으면서 미실에게 말을 걸어보려 하는 것이다.
진짜 미실의 모습이 이랬을 것이다라고 느꼈던 부분들이 있었다. 사다함을 보내고 난 후 죽도록 앓고 난 후에 궁으로 들어갔던..아직은 여물지 않은 미실과 쓰러져가는 집 속의 거지에게 그도 색으로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다며 그와 몸을 섞는 성숙한 여인의 미실의 모습이다. 그 기나긴세월 사이, 미실은 그저 여러 왕들과 동침했던 한 여자가 아니라 그들을 구했던 여자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녀의 강인한 내면, 눈부시게 매혹적이지만 지친 이를 품에 안을수도 있었던 어머니 같은 모습. 그 것을 가진 여자가 그녀 뿐이기에 미실을 원했을 것이다.
미실은 읽고 난 후에 훨씬 이야기거리가 많이 남았던 책이었다. 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정해진 길 사이에 벌어진 틈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상황에서 미실의 삶이 내게 보여주는 것들이 많았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원하는대로 최선을 다해 앞을 보고 걸어가다 보면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조금씩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느낌 말이다.
그래서 미실의 모습이 희미해질 쯤, 다시 한 번 이 붉은 책을 꺼내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여러 번, 아주 오랫동안 곁에 있을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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