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닌 99%의 사람들이 존엄지킬 돌파구 묻고 싶었다”
막노동·대필로 생계 꾸려…의원·배우 등 책 50여권 대필
“소설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


작품을 쓰겠다며 한동안 조용한 곳에 갔다가 돌아오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 그럴 수 없었다. 노동 일이 들어오면 노동판으로 나가야 했고, 중단된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현장을 쫓아 미군을 수발하기도 했다. 수입은 적고 막노동마저 없을 때가 많아 대필도 한다. 현역 의원의 자서전, 유명 탤런트의 에세이, 전문 의학서적…. 심지어 조용한 별장에 갇혀 조직폭력배 대부의 글을 대필하기도 했다. 대필한 책은 50권이 넘는다.

“대필을 하다 보면, ‘갑’(의뢰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기에 자존심이고 뭐고 없어요. 그래서 소설은 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죠. 대필을 하거나 노가다를 뛰면서 짬나는 대로 새벽에 소설을 썼어요.”

상처 입은 존재들이 패배 속에서도 만들어내는 치유의 풍경을 훈훈하게 그린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제8회 세계문학상을 받은 전민식(47)씨의 얘기다. 일용 노동과 대필을 하며 소설을 썼다는 그는 일용 노동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일본 문학계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받은 니시무라 겐타(西村賢太)를 떠올리게 한다.

“대필을 하면 소설가로 문장이 상하는 측면이 없지 않죠.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어요. 대필 의뢰인의 삶을 들으면서 세상을 더 풍부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대필을 한다고 반드시 무너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당선작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는 한순간의 실수로 잘나가는 컨설턴트에서 직업을 잃고 추락한 주인공이 고급 애완견 ‘라마’를 산책시키는 일을 하게 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내용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끊임없이 패배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 냄새가 나는 소설’, 방법론적으로는 언어나 플롯의 낭비 없이 경제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웰 메이드’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루저(loser)가 있을까요? 1%를 제외한 99%의 사람들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루저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아도, 대다수 인간이 존엄과 품위를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통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소설을 썼어요.”

전씨는 도시 한복판에서 다섯 마리의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모습을 담은 ‘뉴욕 타임스’ 사진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4대 보험 등 인간적인 삶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대필과 일용 노동 또한 안정적인 직장이 아닌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경험이 겹쳐지면서 이야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소설은 저를 대신한 주인공이 ‘99% 사람들의 삶이 이렇게 흘러가도 되는가, 돌파구는 무엇인가’ 하고 묻죠. 아마 대다수 인간이 갖는 보통의 고민이자 욕망일지도 몰라요. 주인공처럼 지나친 욕망에 근거한 돌파구는 금방 무너지고 진짜 돌파구는 어쩌면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인지도 모르죠. 내가 죽도록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1965년 부산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전씨는 경기도 평택에서 자랐고, 미8군 보급기지에서 일했던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둔 뒤 뛰어든 사업이 망하면서 아파트 지하방을 개조해 살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고교 2학년 때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29세에 추계예대에 들어간 그는 1997년 졸업 후 ‘머나먼 쏭바강’과 ‘왕룽일가’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박영한(1947∼2006)씨에게서 7년여 문학수업을 받았다.

“박 선생은 혹평을 많이 했는데 그게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총을 뺐으면 발사를 해야 하는데, 발사를 제대로 못한다’고 지적을 하곤 했죠. 삶에서 배운 것도 적지 않아요. 집요함과 끈기, 문단 내 권력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모습 등을 배웠죠. 소설은 기술로 배우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배우는 것 같아요.”

2003년 결혼한 아내 최민경씨도 박씨의 인터넷 소설반의 제자인 전업 소설가다. 재미 있는 건 아내 최씨도 ‘나는 할머니와 산다’로 제3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 전업 소설가 부부는 임대아파트에서 다섯살 아들과 함께 문학을 위해 “매일 기적처럼 산다”(최씨).

“변변한 직업 없이 지금까지 문학에 매달린 것은 고집 때문이었겠죠. 아내는 글을 잘 보여주지만 저는 잘 보여주지 않아요. 대필 업무 때문에 상한 문장을 보여주기 싫었죠. 아내는 밤늦게 쓰고, 저는 새벽에 쓰고 낮에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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